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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승건의 서재 May 01. 2024

변신

어느 날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앞에서 가족들은 묘한 이중적 감정을 드러낸다. 그레고르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며 청소를 하는 그의 여동생은, 그것이 진정으로 그레고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행동을 통해 자신이 적어도 불행한 상황에 놓인 그레고르를 외면하는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자기 설득을 위한 것처럼 보인다. 아프리카에 가서 아이들을 보듬으며 찍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연예인들처럼, 그레고르의 여동생의 시선이 향한 곳은 벌레가 된 그레고르가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러한 과시적 선행은 결국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기대가 놓여있다.


그 점에 있어서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그래도 위선적이지는 않다. 그는 애초에 그레고르가 벌어다 주는 돈에서 아들의 존재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이후부터 철저히 외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 모습은 잔인할지언정 차라리 솔직하다. 여동생처럼 그레고르를 위하는 듯하면서 스스로의 인간적인 면모마저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그레고르를 살펴보자면,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기꺼이 짊어졌다. 그것은 가족을 향한 사랑일까. 아니다. 그렇게 해야만 가족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들로부터 외면받을 거라는 불안감이 그를 희생하도록 떠밀었다. 결국 그가 벌레로 변하여 효용성이 사라지자, 가족들로부터 버려지면서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그레고르의 모습이 떠오른다. 명문대에 들어가서 부모님 어깨를 으쓱하게 해줄 만한 성적이 안 되는 학생들. 병원 수익에 도움이 안되어 진료받을 곳을 찾아 헤매는 필수 의료 환자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싶지만 좋은 직장에서 넉넉한 월급을 받고 있지 않아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혼자 살아가는 이들. 그야말로 그 효용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외면받는 존재들 말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타인을그런데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고 가슴 쓸어내리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효용성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보며 구축한 사회는 언젠가 우리 각자가 기능이 다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도 버림받게 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예컨대 남들에게 기죽기 싫어서 자기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부모는 자식을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용도로 쓰는 것이다. 그렇게 부모의 도구로 ‘활용된’ 자식이 나중에 그 부모가 늙고 병들었을 때 어떻게 행동할까. 처음 얼마간은 인간적인 정으로 병수발을 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회의감이 들지 않을까. 자기 자신도 어릴 적에 부모의 자존심을 위한 도구였을 텐데, 그 기능을 제대로 못 했으면 버려졌을 텐데, 왜 아무 역할도 못 하는 부모를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해야 할까 생각하지 않을까. 부모의 병수발을 하는 수고에서 오는 어려움이 인간적인 도리를 다한다는 평가에서 오는 효용성을 넘어서는 순간,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나중에 나이 들어 병들고 남에게 의지해야 할 상황이 두려워서 지금부터라도 저축하는 마음으로 타인에게 선행을 베풀어야 하는 것일까. 얼핏 들어도 그것은 답이 아닌 것 같다. 왜 그럴까. 나의 가족들과 동료들을 그들이 나에게 기여할 수 있는지로 평가하지 않는 이유가 만약 나중에 그들로부터 버림받지 않고자 하는 어떤 심연의 우려라면, 그것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미 그들을 기능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만약 나 아닌 이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존재 그 자체로 바라보고자 한다면, 이후에 그들로부터 무언가 얻겠다는 기대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결국 타인을 향한 기대가 모든 파국의 기원이다. 가족의 사랑을 기대하며 자신의 삶을 내던지고 무미건조한 삶을 감당한 그레고르. 벌레로 변한 오빠에게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인간으로 해야 할 도리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족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도덕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기대가 있었던 여동생. 자기 아들을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여기다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서 더는 그 기능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의 기대를 거두고 냉랭하게 변한 아버지와 어머니. 소설의 마지막에 그레고르가 죽고 가족들이 떠난 여행에서, 그레고르가 지고 있던 그 기대의 굴레가 이제는 딸로 향하게 되는 장면까지. 소설 『변신』은 시작부터 끝까지 기대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채워 놓은 족쇄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 가운데 벌레로 ‘변신’하여 죽음으로써 기대의 무게를 내려놓은 그레고르만이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나를 향한 그리고 나로부터의 기대가 무엇인지 살피고 그것을 하나하나 벗어나려 한다. 아내와 딸, 직장 동료를 비롯해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타인을 대할 때 나의 주관이 반영된 잣대를 들이대고 거기에 맞추길 바라는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내가 남들의 기대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잊지 않겠다. 나를 향한 타인의 기대는 결국은 나를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므로, 그 도구로서의 효용이 끝나는 순간 벌레가 된 그레고르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는 작가의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나 스스로 도구가 아니어도, 누군가를 도구로 삼지 않아도, 그러한 기대 없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거듭나고 싶다.


원문: https://shinseungkeon.com/%eb%b3%80%ec%8b%a0/ | 신승건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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