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취향과 돈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장항준 감독은 스타일이 제법 좋아졌다는 패널들의 말에 대뜸 '와인'이라는 알 수 없는 대답을 내놓는다.
"전에는 밀크커피만 먹었어요. 밀크커피만. 그런데 이제는..아메리카노"
몇 년 전과는 자신이 사뭇 달라졌다며 와인과 아메리카노, 평양냉면이라는 세 단어로 본인을 소개한다. 지식인 느낌의 취향을 완성하였다며 목에 힘을 준다. 잘나가는 아내 덕에 이제 좀 살만해졌다는 것을 소주에서 와인으로 주종이 바뀌는 것으로 비유하며 유쾌하게 말한다. 자랑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 밉기보단 어딘가 모르게 사랑스럽다.
"이번에 장 보러 가면..나 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사도 돼?"
H는 참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이렇게 묻는다. 무언가가 갖고 싶을 때면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이번에는 또 무얼지.
분주한 대형 마트. 추석 명절 대목이라고 입구부터 각양각색의 선물 세트가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를 신이 난 미어캣처럼 누비던 그가 집어 든 것은 다름 아닌 잭다니엘이다.
"위스키는 말이야, 먹는 방법이 따로 있는 거 알아? 노즈, 팔레트, 피니시 이렇게 세 단계가 나뉜대. 첫 단계는 위스키의 향을 맡는 노즈. 향을 맡고 난 다음에는 코로 숨을 한번 들이쉰 뒤에 숨을 멈추고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켜봐. 이게 팔레트야. 여기서는 주의할 점이 있어. 위스키는 도수가 높기 때문에 표면이 공기와 만나면 알콜이 올라오거든. 그래서 마실 때 최대한 공기를 들이쉬지 않도록 노력해 봐. 마지막은 피니시야.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후 하고 내뱉으면서 위스키의 향, 그리고 맛을 느껴보는 거지."
이번 장보기로 원하던 바를 성취한 그는 이번에 주류학개론이라는 유투브를 알게 되었다며 위스키에 대한 설명을 재잘재잘 늘어놓는다. 잔뜩 흥이 오른 얼굴로 찰싹 붙어서는 내 반응을 살핀다. 한껏 들떠있는 H가 귀여워서 괜히 딴지를 한번 걸어본다.
"나 위스키 좀 마셔봤는데? 왜 나 전에 다니던 회사에 위스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잖아."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어도 과거에 위스키를 좋아하는 동료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다. 퇴근 후에 종종 위스키 모임이 열렸고 나도 두어 번 정도는 함께 어울려 위스키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마시는 방법 같은 건 배워본 적이 없었다. 당시에는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고, 어차피 비싼 술은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딴지 거는 것은 이쯤하고, 한껏 신난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설명을 따라 한 모금 마셔본다.
'숨을 멈추고 한 모금, 그리고 다시 숨을 뱉으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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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마시는 방법이 따로 있었구나!'
한때 나는 취향이 없는 게 꽤나 고민이었다. 이게 왜 고민이냐고 묻는다면, 취미나 특기를 소개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퍽 난처기 때문이다. 가장 좋아하는 게 뭔지 뚜렷하게 말할 거리가 떠오르지 않는 거다.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는 날에 기분 전환이라도 하려고 해도 좀처럼 속 시원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건 대부분 중간 정도의 물건들이었다. 가성비가 좋고 어디든 잘 활용할 수 있는 것, 가격에 맞춰 무난한 것을 사는 게 몸에 깊숙이 밴 습관이었다. 그러다 보니 취향이라는 것을 가질 틈이 없었다. 현재도 금전적으로 넉넉하다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지만 처음 돈을 벌기 시작하던 때보다야 주머니 사정은 훨씬 나아진 편이다. 이제는 취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하나둘 생겼다. 최근에 이렇게 물어 온 지인이 있었다.
"진희 님은 힘이 들 때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뭐가 있어요?"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택시'라는 대답을 떠올렸다. 요즘은 한 달에 두, 세 번은 택시를 타고 출근을 한다. 한 푼, 두 푼 소중한 월급을 벌러 전장직장으로 떠나는 나를 위한 선물이다. 사회초년생 때는 집과 회사가 가까워서 오천 원 정도 나오는 비용에도 한 달에 한 두 번 탈까 말까 했었다면 이제는 한 네 배쯤 되는 금액도 기꺼이 투자할 수 있다. 나에게 돌아오는 가치가 그만큼 크니까.
단순히 취향의 필수 조건이라는 돈이라는 건 아니다. 많지 않은 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뚜렷하게 알고 본인의 취향을 누리는 것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저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경험이 쌓이고, 그 속에서 더 좋고 더 마음이 가는 쪽을 선택하다 보니 하나둘 취향이 생겼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나와 맞는지 아닌지를 생각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대상을 다시 찾는 것. 이것이 내게는 취향이다. '돈'은 더 많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경험'은 취향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만들어준다. 지난 시절의 나는 사실 취향이 없었다기 것보단 취향을 가질 여유가 없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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