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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믐 Jun 23. 2022

[격리중讀] 죽음, 삶에 대한 찬사.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2018년, 드라마 작가 학원을 다녔었다.

그 과정을 제대로 마치진 못했지만, 내 평생 인생을 제대로 다뤄본 웰메이드 드라마 한 편은 꼭 찍어내리란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때 나는 '엄마의 상'이라는 주제로 시놉시스 한 편을 제출했다.

선생님은 스토리가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때도 지금도 무지 성으로 썼던 나의 이야기가 썩 맘에 든다.


어느 날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온 엄마.

엄마의 죽음에 대한 뜻을 미리 알고 있던 첫째는 심폐소생을 하지 않는다.

엄마는 수년 전, 미리 자신의 수의를 곱게 지어두고, 그것을 입고 찍은 영정사진을 마련해두었다.

장례에 초대할 사람들과 조문객들에게 대접할 음식, 장례를 꾸밀 꽃과 노래, 향까지도 이미 정해두었다.

엄마는 죽음으로써 엄마로, 아내로, 무언가로 살아야 했던 그 모든 역할을 떨쳐내었다.

지극히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이 이렇게 끝을 맞이했다는 축하를 받고 싶었다.

사는 동안만큼은 결코 자연스럽지 못했던 순간들이 너무 많았지만, 죽음의 순간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장례식을 통해 아무도 몰랐던 그녀의 충만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엄마는 둘째 아들이 지나가듯 말했던 폭죽장에 웃었다.

그 기억을 붙잡으며 밤하늘에 수를 놓는 자녀들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삶이라는 것은 죽음을 계획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잘 죽을 것인지에 대한 수많은 기회와 선택지들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주는 자연스러움을 거스르려다 단 한순간도 충만하지 못한 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얼마나 용기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돌이켜본다.


죽음이라는 삶의 단편에는 삶의 전부가 있다.

내가 삶을 마친 날.

나의 죽음이 잔치가 되고 축제가 되는,

나의 지나온 삶에 대해 고생했다는 격려와, 잘 살았다는 찬사를 받기를 바란다.

단 하루라도 더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단 하루라도 더 삶의 자연스러움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을 하기를.

단 하루라도 더 내어 맡김으로써 충만하기를.


죽음을 계획하고 있는 나에게,

잘 죽을 기회가 남은 나에게,

아직 살아가는 나에게 같은 질문을 보낸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두려운 것은 무엇이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꺼이 포기할 용의가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최상의 행동 방침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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