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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봅 Feb 24. 2020

일상을 위하여, 커피 한잔

 현대사회에서 커피는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여유'라고 생각한다. 


 커피 그 자체가 여유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커피를 통해 여유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오죽하면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이 이토록 친숙할까. 커피 그까짓 게 뭐라고 '여유'라는 거창한 의미를 뒤집어쓰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조금 우습기까지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커피는 여유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최근에 '커피 한 잔의 여유'라는 카피와 대적할 만한 말을 발견했다. 


 바로, '커피 수혈'.


 커피 수혈이란 피곤할 때, 업무가 과중할 때, 혹은 아침 출근길에 잠이 깨지 않을 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집중력이 떨어질 때 등의 상황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그 힘으로- 정확히는 카페인의 힘으로 그 순간을 버텨낼 때 쓰는 말인 듯하다. 사실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이런 맥락으로 쓰이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나 또한 커피 수혈을 한다. 

 요즘엔 육아에 지쳐서, 예전엔 회사에서 정신 차리기 위해서, 더 전에는 시험공부를 위해서도 커피를 '수혈'했다. 


 그러나 이렇게 필요를 위해 쭉쭉 들이키는 커피는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커피를 이용해 '여유'를 찾고 싶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커피 수혈'보다는 오래되고 뻔해 보여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원한다. 그래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수혈을 했으면서도 해가 잘 드는 오후에는 여유를 위한 커피를 다시 찾는다.


 나에게는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첫 번째, 혼자일 때 더 좋다. 


 여기에서 말하는 혼자라는 것은 아주 절대적인 개념은 아니다. 실질적으로는 둘이 있더라도 아주 소란스럽지만 않은 상황이면 된다. 대화를 하더라도 짧고 일상적인 것만 하고 싶다. 즐거움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지만 여유는 되도록 혼자 즐기고 싶다. 

 커피만을 위해 카페에 간 상황이라면 더 편해진다. 나를 제외한 손님이 몇 명이 있건, 그들이 조용하건 시끄럽던 상관없다. 나는 내가 할 일을 하거나 잡생각을 하거나, 혹은 글을 쓰거나, 하릴없이 핸드폰만 바라보기도 한다. 그런 평화롭고 게으른 분위기를 사랑한다.


두 번째, 음악.


 음악을 사랑한다. 음악은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기분과 분위기를 달리 해 준다. 예를 들어 집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더라도 보사노바 풍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만은 저 멀리 이파네마 해변으로 가게 되고, 팝송을 들을 땐 괜히 뉴요커라도 된 듯 브런치를 곁들이고 싶어 진다. 이때 듣는 음악은 감상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떤 음악이든 상관없이 커피와 어울린다. 


 나는 종종 인공지능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듣는다. 커피 마시며 들을 음악 들려줘, 라거나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 들려줘, 라는 등 아주 구체적인 상황을 설정해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냥 음악 틀어줘 라고 심플한 주문을 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분위기도 모르고 동요가 플레이되기도 한다. 그러면 보통은 김이 팍 새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어느 날에는 커피와 동요가 또 어울릴 때가 있다. 그날그날 내 기분에 따라 다른 것이다. 

커피를 꼭 분위기 잡으면서 마셔야 할 이유는 또 뭐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커피에 동요를 곁들인다. 그럴 때면 괜히 아기 사진을 들여다보거나, 육아에 대한 글을 쓴다. 그 순간 또한 퍽 사랑스럽다.


세 번째로는, 시간이다.


 밤에는 마시지 않는다. 이건 순전히 카페인에 약한 나의 체질 때문인데, 나는 오후 4시 이후로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잘 자지 못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커피로 인한 여유라던지, 분위기를 잡는다던지 하는 것은 점심 나절을 지나며부터는 부담스러워진다. 그래서 늦은 오후부터 마시는 커피는 여유라기보다는 걱정이 되어 버리니 커피를 통해 여유를 찾으려는 원래의 목적과 맞지 않는다.

 물론, 가끔은 불면을 무릅쓰고서라도 커피를 마시고 싶은 때가 있다. 늦은 밤 비가 와 마음이 울렁거린다던가, 여행 중 발견한 어느 카페가 너무 마음에 든다거나, 생각할 거리가 많아 잠들고 싶지 않은 때 등등... 그럴 때는 가끔 원칙을 무시하는데, 사실 이런 상황에서 마시는 커피는 시간과 상관없이 다시 여유가 된다. 

 

 하지만 일상 속 나는 커피를 걱정스럽게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즐기기 위한 커피는 늦어도 오후 4시면 끝이 난다. 


 기분에 따라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고 하고, 부드러운 라테를 마시기도 한다. 뜨겁게도 마시고, 차갑게도 마신다. 직접 핸드드립으로 내릴 때가 있는가 하면 대충 믹스커피를 탈 때도 있다. 쓴 커피도, 단 커피도, 커피의 종류, 심지어는 맛을 떠나서도 괜찮은 때에 마신 커피 한 잔은 여유를 준다. 그래서, 어쨌거나 커피는 항상 옳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소란스러운 하루 중 가장 정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그 시간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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