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기억
우리가 이젠 같은 복도에서 마주칠 수 없게 된 그 해는 유독 길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추억은 많이 없다. 셋이 다 다른 학교로 배정이 되고, 나는 함께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까지 갔다. 그렇지만 학교는 내가 중학교와 가까운 학교로, 현재와 허구는 내가 사는 동네와 가까운 학교로 진학했다. 만나지는 못하는데 얼핏 가까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금 너네 집 지남ㅋㅋㅋㅋ 우린 언제 만나냐?
야 나도 방금 니네 학교 지났어. 시험 언제 끝나?
서로 반대 방향의 버스를 타고 하는 연락들은 약속을 잡지 못하고 여러 번 그리움과 보고싶은 마음만 전달했다. 함께 있으면 호탕하게 웃을 때도 이 둘에게 애정을 느꼈지만,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 버스 안에서 나는 내 친구들에 대한 소중함을 깊이 깊이 깨달았다. 중학교 1학년 이 후 셋이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따금 복도에서 서로를 만나곤 했다. 그럼에도 나는 3년 동안 가장 친한 친구는 이 두 명이었다. 고등학교 교적부에 적는 다른 학교 친구 이름칸에는 당연스레 현재와 허구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그래서일까, 아이가 부모에게 겪는 분리불안처럼 나는 이들에게 그런 비스무리한 감정을 겪었다. 처음 교실로 들어가는 복도의 풍경은 고작 내 친구 2명이 없는 것인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다행히 고등학교 1학년 같은 반에 현재의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나와는 그저 인사만 하던 사이었는데, 현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단짝이 되었다. 굉장히 미안한 말이지만 그 때의 심정은 그 친구에게서 현재의 흔적을 찾았던 것 같다. 그래서 3월 한 달 동안 우리의 대화 주제는 현재였다. 현재도 현재 나름의 새 학교에 적응을 하느라 이 사정을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현재와 허구랑 달라서 잘 맞는 친구였다면, 그 친구는 현재와 많이 닮은 친구였다.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 순한 말투가 현재와 비슷했다. 그 친구 덕분에 현재를 덜 그리워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 친구들을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는 늘 그랬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피곤했다. 꼬리를 무는 생각에 감정까지 더하면 정말이지 ‘현생’을 살기 힘들 정도였다. 상상도 많이 하고 그만큼 꿈도 자주 꿔서 사춘기를 지날 시절엔 가끔 상상하고 꿈꾼 내용들과 진짜 기억이 헷갈렸다. 그래서 의지적으로 생각을 많이 안 하려고 노력했다. 예민함을 숨기고 둔감한 척했다. 가진 생각에 감정을 배제해 다시 생각해보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보니 내가 날 잘 모르고 시간이 지난다. 많이 좋아하는 것을 시간이 지난 후 없어져야 알아챈다.
중학교 때부터 공부는 잘 안해도 교내외 대회란 대회는 다 나갔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했다. 나말고 다른 친구들은 공부에 집중했던 것 같다. 학생회를 고등학교 3년 내내 했고, 동아리 기장을 하면서 청소년 시의원 활동이나 청소년 합창단 활동을 했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집짓기 봉사활동을 나갔다. 그렇다보니 깊은 교우 관계가 더 어려웠다. 아침이면 교문 앞에 서서 지도부 활동을 했다. 점심시간이면 동아리 모임을 나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5교시 시작 직전에야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에 내가 없어도 선생님들이 찾지 않으실 정도였다. 처음부터 현재와 허구같은 친구를 찾지 못해서 그렇게 대외 활동을 많이 한 것일까? 반대로 대외활동을 하느라 친구들과 더 친해지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선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활동을 하나라도 같이 하는 친구들은 많은데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친구는 거의 없다. 그걸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체육대회와 축제를 연이어 했는데, 그 때마다 반티를 맞췄다. 그 시절의 트렌드는 축구 유니폼에 번호와 별명을 새겨 넣는 것이다. 우리 반도 어김없이 반티를 제작하려고 학급회의를 열었다. 실명을 넣을 것이냐 별명을 넣을 것이냐로 토의를 했다. 나는 아직도 뚜렷한 별명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실명을 새길 것에 의견을 내며 이유로 별명이 없음을 이야기했다. 같은 반 친구들은 쉽게 내 별명을 만들려고 하다가 결국 학급회의가 산으로 가서 다같이 내 별명을 고민해줬다. 시간 내에 내 별명은 찾지 못했고, 나는 반티에 홀로 이름을 새겨넣었다. 그토록 나를 애칭 혹은 별명으로 부르는 친구가 없었다. 두루두루 친해서 밥을 혼자 먹거나 수학여행 때 버스에 혼자 앉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중학교 때와 대비되어 그랬는지 많이 외로워했었다. 실제로 누군가랑은 짝을 지어 잘 다녔음에도 수학여행이나 외부 활동으로 나가기 전날 밤은 늘 걱정에 괴로워했다.
우리 세 명 중 나만 남녀공학을 다녔다. 나는 내가 7회 졸업생인 신생학교를 들어가서 복자도 두발도 가장 자유로웠다. 중학생 시절 있었던 귀밑 7센치의 지긋지긋한 규정에서 벗어나 머리를 길게 길렀고, 반대로 규정이 엄격한 남고에 진학한 허구는 달걀 같은 두상이 훤히 드러나는 스포츠머리를 했다. 현재는 여고를 다녔는데 개성 강한 빨간 교복 때문에 머리가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달라진 모습을 하고 번화가에서 각자의 교복을 입고 모였을 때가 생생하다. 어느 지역에나 있는 랜드마크에서 기다리면서 가진 달뜬 마음과 먼저 도착해서 괜히 늦게 오는 허구에게 더 장난을 치고 놀렸었다. 중학교 때처럼 똑같이 밥을 먹고 노래방을 가고 카페에 가서 수다를 떨었다. 중학교를 들어가던 나에게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셨었다. 중학교 친구가 제일 안 남으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러 가도 엄마는 신기하다고 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그렇게 잘 모이냐고. 스무살 즈음엔 보수적이었던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통금을 깨고 밤늦게까지 놀거나 조금 더 지나서는 여행까지 가능한 유일한 외박 프리패스 친구들이었다. 더 철없을 때는 “어디 다녀왔어?”라는 질문에 가끔 무지성으로 친구들 핑계로 쓰기도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고백한 적도 있었는데, 노여움을 타지도 않고 각자의 집에서도 부모님께서 안부를 묻는다며 공감해주었다. 너무 가끔씩 만나기 때문에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 하고 있는 고민은 뭔지도 물어볼 수 없을 때가 많았다. 혹은 한 명이 이야기를 쏟아내느라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 오늘 누구 얘기는 너무 못 들었네 ..’하고 후회한 적도 많았다. 보통은 말을 많이 하지 못한 친구가 더 고민거리를 쌓아두던 시기였다. 그래도 서운함보다는 주고 받던 농담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쌓아둠으로 마음이 개운해지곤 했다. 언젠가 문득 떠올려 카톡방의 알람을 울리는 사이면서 만나면 어제 만난 듯 어색한 기류를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이들을 아낀다는 것을 고등학교를 가서야 알았듯이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정으로 몇 년이 지나 우리의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진짜 친구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