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2월
2월은 1년 중 가장 큰 이벤트가 있다. 내 생일. 어렸을 때는 2월이 생일인 것에 불만이 많았다. 빠른 년생 제도를 따르던 유년 시절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상 한 살 차이나는 동급생들은 유치원 새학기가 될 때마다 친구로 인정해주지 않아 실랑이를 벌였다. 항상 몇 명과 키를 재면서 조금이라도 작으면 언니 혹은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지금도 절대 지지 않는 성격인 나는 목소리를 키우며 싸웠다. 그래서 봄이 오면 늘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입은 댓 발 나와있었다. 그러다 7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 입학식만 가고 엄마는 걱정을 앞세워 나를 다시 유치원으로 돌려보냈다. 그 해 나의 친구는 언니가 되었고, 동생은 친구가 되었다. 내게 2개나 있는 유치원 졸업 앨범을 다 커서 꺼내어 보았다. 다시 보니 첫 번째 7살 반에서 찍었던 사진에서도 내 키는 작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두 번째 7살 반에서 찍었던 사진은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아마 지금의 시니컬한 성격은 그 때 다 배운 내용을 또 배우러 갔던 두 번째 7살에 생긴 것 같다. 나는 아는 걸 친구가 된 동생들은 모르니 깊은 한숨을 쉬고 있지 않았을까. 그 외에도 2월에 생일이 있다는 것은 내 생일은 무조건 방학이라 언니들처럼 친구들을 불러 생일파티를 하기도, 친구들에게 축하를 받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불리하다는 생각으로 내 생일을 집착적으로 기념하고 챙겼다. 하루는 생일이 주일이었는데, 교회에 다녀온 아빠가 롤케이크를 받아와서 그걸로 생일 축하를 한다고 했다가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울었다. 서러워서. 꼭 선물을 받지 않아도 동그란 생일 케이크에 생일 축하 노래와 초를 꽂아 놓고 노래를 불러야 했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도 먹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집안에 막내인 내가 반찬도 놀러가는 곳도 뭐든지 다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내 생일은 나에게 1년 중 제일 중요한 날로 새해 첫 날부터 광고를 하며 기다렸다. 그러다 내 생일이 더 특별한 이유를 찾았다. 내 생일은 매년 입춘이다. 가끔 2월 3일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입춘은 매년 2월 4일이다. 立春: 봄이 시작하는 날이다. 봄의 시작이라니 너무 설레고 특별한 날 같았다. 봄이 시작된 날 태어난 아이라니 특별한 생일을 가진 기분에 그 이후로는 내 생일을 2월 4일이라고 하지 않고 입춘이라고 말한다. 조상들의 지혜인가 내 생일은 날씨가 궂은 날이 거의 없이 겨울 날씨였다가 별안간 따뜻한 날이 된다. 날씨로 축하 받는 기분은 최고다. 생일에 아침 뉴스를 키면 기상캐스터가 “오늘은 입춘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게 마치 나에게는 “여러분 오늘은 지인의 생일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올해는 몇 해 만에 가족들이 모두 모인 생일 파티를 했다. 물론 다같이 밥을 먹진 못했지만 점심은 부모님과 작은언니와, 저녁은 큰언니네와 함께 식사를 했다. 내 생일도 생일이지만 정말 오랜만에 가족들과 주말을 보내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내 체력이었다. 얼마 전 빙판길에서 살짝 미끄러졌는데, 고질병이던 목 디스크가 터져 주사 시술을 받고 보호대를 착용하던 참이었다. 디스크는 내 생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보호대를 착용하는 불편함이 백배는 나았다. 덕분에 작업들은 밀려 있어 생일에 쉬어도 되나 싶었다. 그렇게 쌓아 둔 할 일을 들고 아침 일찍 본가인 천안으로 향했다. 급행 지하철을 타고 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디자인을 버스에 앉아서 해치웠다. 일을 두고 오지 못하고 가방에 카메라와 업무용 태블릿 PC와 외장하드를 챙겼다. 터미널에서 가족들을 만나서도 앉아서 버스 안에서 해치운 디자인의 컨펌과 오타 수정을 진행했다. 사실 첫 번째 급행 지하철을 놓치는 바람에 서둘렀음에도 일정이 많이 밀렸다. 첫 행선지는 미리 예약해둔 스튜디오였다. 이미 학교에 딸린 스튜디오에서 근무하지만 오늘은 효도 촬영이었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시는 아빠가 새롭게 한국 업체와 개발 중인 제품의 카탈로그에 쓰일 사진과 영상을 촬영했다. 내 일이 너무 바빠서 미처 예전처럼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아마추어의 서툰 솜씨로 제작한 제품 소개 PPT가 제법 충격적이었다. 딸래미가 영화영상을 전공했고 심지어 현업이 마케팅인데 이 정도 수준이라니. 큰 맘 먹고 호리존 스튜디오를 예약했다. 그러나 처음 시작부터 늦었으니 큰일이었다. 2시간 예약한 스튜디오 시간에 30분도 넘게 늦게 도착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고자 노력했다. 도착하자마자 뒤에 예약 손님이 있는지 묻고 1시간을 연장했다. 무인 스튜디오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셋팅을 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것도 업무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는지 아빠와 모델 역할을 해줄 작은 언니만 동행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엄마는 스튜디오를 예약했다는 소리에 남는 시간에 사진을 찍을까 하여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 따라 나오셨다. 작업을 앞두고 분주하고 예민해진 성깔이 나올 뻔했지만 오늘은 생일이다.
그런데 아빠가 준비해온 제품을 보니 울화통이 터지고 말았다. 아빠의 제품은 말하자면 방석형 진동 안마기인데 새제품도 아닌 샘플 제품을 너덜너덜해진 박스에 담아왔다. 나에게 당연했지만 아빠에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마주하고는 헛웃음 밖에 나지 않았다. 나에게 당연했던 것은 광고를 찍듯 고객용 패키지와 시연용 제품 등 적어도 3개 이상의 제품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난 설 명절에 열심히 스토리보드를 그려가며 제품의 장점을 보여줄 장치도 여러가지 생각했다. 진동을 보여줄 물이나 구슬이나 여러가지를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정작 스튜디오에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우선 침착하고 제품 접사만 먼저 촬영 후 언니를 모델로 세워 시연 컷을 촬영했다. 그리고 언니와 머리를 맞대고 가방에 있던 소지품을 모두 꺼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민트 캔디 한 통과 언니가 먹는 하얀색 알약이었다. 올려놓고 보니 이게 안마기 광고인지 캔디 광고인지 모르겠다. 의약외품 느낌이 강하게 들면서 뭔가 건강에 관련된 것만 알겠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가방에 들어있는 실리카겔(방습제)를 터트려 올려놓으니 반투명하고 작은 알갱이가 우리가 생각하던 딱 그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제품 촬영이 끝나니 이제야 가족들이 준비한 생일파티 소품이 들어왔다. 가족들 눈에는 내가 서른 한 살을 먹어도 여전히 막내 공주님 인가보다. 요즘 유행하는 핑크색 어린이 캐릭터 케이크를 사왔다. 나도 오랜만에 카메라를 잡은 김에 가족들 한 명씩 프로필을 신나게 찍었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느라 손질 안된 머리와 얼굴 컨디션이었지만 나도 가족들 앞에서만 나오는 잔망을 떨어보았다. 타이머로 맞추고 넷이 가족 사진도 찍었다. 최고 행복한 표정을 짓다 보니 진짜 최고 행복한 순간에 도래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순서가 뒤바뀐 행복감에 순간 이성이 브레이크를 걸었지만 나는 즐기기를 선택했다. 아니 내 이성이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판단했다. 좋지 않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사랑하는 부모님,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나를 챙기는 작은 언니와 생일 케이크를 들고 활짝 웃고 있으니까. 소비에 대한 만족감이 들었다. 평소라면 이 가격의 자켓 하나 사는 것도 벌벌 떨었을 가격이었다. 공간을 빌린다는 것에 대한 값을 늘 아깝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은 정말 어른이 된 기분, 뿌듯했다.
기분 좋게 스튜디오 촬영을 마쳤다. 그러니 아침부터 뭐 하나 입에 넣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 상기되었다. 모두들 허기를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말했다. 부모님과 작은 언니는 함께 베트남에서 5년 이상 거주했다. 우리는 그리움과 추억을 공유했다. 최근 가장 현지의 맛을 낸다는 베트남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 근처서부터 풍기는 느억 맘의 향에 마음이 몽글 해졌다. 흥분한 마음으로 작은 언니가 ‘메뉴판의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주세요.’를 시전했다. 4명이 앉은 테이블이 꽉 차도록 8가지 베트남 음식이 쏟아졌다. 한국식으로 재해석해 내 입에는 아쉬웠지만 그래서 더 좋다며 함께 맛있게 먹었다. 사실 나는 음식의 맛보다는 이 메뉴를 이렇게 넷이 또 함께 먹고 있다는 것에 감개무량했다. 음식과 같이 우리는 베트남의 추억들을 소환했다.
이 메뉴가 맛있던 집은 랑하 111번지였는데, 로컬 바잉쎄오는 이렇게 크지 않아. 더 두꺼운데 바삭하지. 우리가 이거 먹으려고 그 무더위에 걸어서 몇 분을 걸었잖아. 가면서 더워서 사먹은 음료수랑 아이스크림이 더 비쌌지.
우리는 그 때 참 행복했었다. 나의 20대의 대부분을 보낸 동남아의 도시. 아픔을 묻고, 회복하고, 웃었던 공간이다. 한국에서 살았던 수십 년보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돈독 해졌다. 무엇보다 내가 얻은 것이 가장 많다. 한국에서 나는 가족 내에서 늘 막내로 도움을 받던 객체였다. 그러나 하노이에서는 먼저 배운 언어로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주체가 되었다. 비로소 나도 가족 안에서 무언가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는 기쁨이 있었다. 내게 20대의 성장의 동력을 고르라면 단연 해외 생활이었다. 다른 유학생이나 주재원들처럼 혼자 갔다면 이렇게 깊고 넓은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들을 통해 연결된 만남의 기회들이 나를 노력하게 했고, 가족들이 있는 돌아갈 집이 나를 버티게 해줬다. 이것이 지금 크게 행복으로 기억되고 그걸 재현한 지금이 유독 더 행복하다. 그 이유는 대비된 시간 때문이다. 조카들까지 7명이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와 서울에서 혼자 살았다. 내가 아무리 차를 타고 달려도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기분으로 몇 해를 살았다. 한국에서 일을 시작하고, 사회초년생으로 겪은 것들을 싸 들고 당장이라도 엄마 품 속으로 들어가 울고 싶은 나날들이 있었다. 몇 년간 나에겐 어른이 너무 필요했었다. 비단 엄마와 아빠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같은 눈빛으로 날 바라봐주고 인사 나눴던 주름 패인 이웃들이 고팠다. 때로는 그 많은 눈들이 내게 부담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없어져버리니 준비가 안된 채로 산에 풀어진 반려견이 된 기분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하늘문마저 막혔을 때는 정말이지 정신마저 아득해졌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 다시 한국에 엄마가 있는 우리집이 생기고,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것이 진짜 생일 선물 같았다.
이야기 꽃을 피우느라 출근 시간보다 늦게 언니를 회사에 내려주었다. 아침부터 바쁘게 몰아친 바람에 집에 도착해 짐을 풀자마자 뻗어서 단잠을 잤다. 한참 맛있게 자고 있는데 꼼지락거리며 여기저기 찔러보는 손에 눈을 떴다. 말도 못하지만 말도 못하게 귀여운 셋째 조카가 배 옆에 옴작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큰언니와 형부가 와서 저녁 생일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저녁 생일상을 받았다. 고작 2주 전이었던 명절이 다시 온 줄 알았다. 소고기가 잔뜩 든 미역국은 물론이고 각종 전에 불고기에 식탁이 원목이어서 다행이었다. 큰언니와 형부도 같은 시선으로 날 바라보는 건지 나를 위해 뽀로로에 나오는 분홍색 비버 루피 캐릭터 케이크를 사왔다. 내가 지난 해부터 “우리 이제 같은 30대야.”라고 힘주어 말했던 것도 잊은 게 분명하다. 두 번째 생일 축하 노래였음에도 신나게 부르고 야무지게 소원도 빌었다.
가족들이 모여 앉은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31살에 뭐했더라. 엄마와 아빠는 31살에 둘째를 낳았다. 큰 형부는 내 기억으론 대리를 달았다. 큰 언니는 결혼을 하고 교회 사역을 하면서 아기를 준비했다. 작은 언니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하노이로 이민을 왔다. ‘역시 내가 좀 늦은 걸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가족 중 아무도 31살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내 인생 경로에 대한 불안감이 표정을 굳혔다. 그러나 이내 웃기로 했다. 남들보다 늦지 않는 걸 목표로 세우는 것은 어리석다. 이미 글렀다. 그래서 나는 31살 생일에 다짐했다. 앞으로 내 인생의 목표는 뒤돌아봤을 때 희미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너무 용쓰느라 아프지 않도록. 또 앞선 생각으로 미리 포기해서 가슴 쓰리지 않도록. 예전에는 미래를 생각하며 설레고 기대하는 감정이 많았는데 요즘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 크다. 그래도 나는 내가 잘될 거라는 마음이 있다. 결국은 완성될 인생에 매일이란 시간을 쌓으며 갈 때 조금 더 다양한 색의 지층이 되도록 지금 행복하고, 지금 노력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