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살던 베트남으로 간 현재
때는 바야흐로 우리가 20대 중반을 향해 가고, 내가 베트남에 터를 잡은지 3년 째 되던 해이다. 나는 2013년부터 준비해 2014년에 베트남으로 부모님과 함께 이주했다. 처음엔 대학 등록금을 보장받고 부모님의 해외생활 적응을 돕기 위해 1년만 있도록 계획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빨리 하노이라는 도시에 적응해버렸고 또 일을 벌린 상황이었다. 이제 한국에는 집도 보호자도 없으니 더욱 다시 돌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복학하고 한 학기를 다니고 기말고사를 본 그 날 바로 하노이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곤 다음 학기 오리엔테이션 1주를 날리고 최대한 늦게 귀국했다. 어렵기만 했던 베트남어도 어느새 간단한 쇼핑이나 필요를 말할 수 있는 정도였고, 늘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생활이 신났다. 처음에는 한국의 치열한 대학교, 아르바이트 그리고 촬영 현장에서 못 잤던 잠을 실컷 자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다음엔 언니들 없이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는게 좋았고, 그 다음엔 싼 물가에 외국인이란 신분으로 해보고 싶었던 패션을 마음껏 시도할 수 있어 좋았다. 배꼽티도 처음 입어보고, 여행 아닌 일상에서 민소매도 처음 입어봤다. 물론 베트남에서도 일은 했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어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줄이려 공부해봐도 사회에서 이방인인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토착민들의 기분에 따라 공격대상이 되기 쉬웠다. 유독 스트레스가 많은 날은 택시를 타지 않고 오토바이 택시인 쎄옴을 탔다. 오토바이 기사 뒤에 앉아 바람을 맞으면서 집까지 돌아가면 그걸로 그 날의 스트레스는 해소가 되었다.
그러다 돌아온 한국의 일상은 안정적이라기 보다 혼란이었다. 인생의 대부분인 한국이었는데, 겨우 1년 조금 넘게 산 베트남이 나의 여러 면모를 각성시켰다. 처음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다는 불안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원인은 캐릭터 붕괴였다. 다시 만난 일상과 그 안에 있던 내 캐릭터는 본인이 제일 혼란스러울 정도로 갭차이가 컸다. 그런 나의 심리는 아주 조금씩 여러 관계에 흠집을 내었다. 겉은 멀쩡하게 남기고 속만 파먹어 집을 무너뜨리는 흰개미처럼 야금야금 무너져갔다. 복학 후 첫 방학을 베트남에서 길게 보내고 온 후 한 달동안 애인과 교회, 친구 관계 모두에 난관에 부딪혀 내 상태는 심해로 가라앉기 직전의 난파선 같았다. 그렇게 혼란을 겪던 중 사고가 터졌다. 깊게 말하긴 어렵지만 이 계정의 오랜 구독자라면 알고 계실 이야기이다. 신변의 안전이 위협받는 일이었다. 법적보호자가 곁에 없음에 대한 불안을 심어준 일이자 내게 법적인 보호자가 없어도 되는 성인이라는 신분을 각인 시켜준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한국의 일상은 더 이상 내게 안전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오래 또 깊이 아픈 사람이 되었다.
당시 부모님이 계신 진짜 집은 베트남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본가가 어디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본가는 베트남이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의 병원 치료를 받은 후에 내게 내린 처방은 안정과 나를 책임져줄 보호자였다. 그렇게 다시 베트남에 돌아가게 되었고, 그 땐 기약 없는 베트남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노이에서 나그네가 아니라 진짜 정착할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학교도 다니고 프리랜서로 잠깐 하는 촬영일이 아니라 고정적으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어느 정도 2번째 하노이 생활에 적응할 때 둘째 언니네도 하노이로 이주하게 되면서 새로운 시즌이 열릴 때였다. 사실 결국 내가 1년 반 하고도 몇 달을 지내는 동안 두 친구들은 내가 오면 갈 곳들을 리스트업 해가며 나를 기다렸다. 혹시 둘이 만나게 되더라도 꼭 표현을 이렇게 했다. ‘여기 너 오면 같이 갈 곳이야. 우리가 먼저 답사왔다.’ 그렇게 기다려준 덕분에 한국에 오면 친구들을 만나는 게 고정적인 스케쥴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혼란 속에서도 이 관계만큼은 어려움 없이 잘 버텨주었다. 더 다르게 말하면 내게 남은 인간관계란 이 친구 둘 뿐이었다. 그래서 이 시절의 편지를 보면 친구들을 향해 나는 ‘내 보험’, ‘내 남은 동아줄’ 따위의 표현을 썼었다. 남을 탓할 여지가 없이 내 인생의 고단함을 핑계로 사람들을 많이 잃은 시기였다. 남은 현재와 허구는 내 노력이 하나 없이 오직 두 친구의 애정과 노력으로 버텨주었다. 그냥 나를 친구로 계속해서 두었다. 아픔을 떨쳐내라고, 서둘러 인생의 여정을 다시 꾸려보라고 재촉하지 않았음에도 내 스스로 저들에게 좋은 친구로,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내 자리에서 발버둥치게 만드는 존재들이었다. 한순간도 나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기에 죽어도 부끄러운 존재가 되기 싫었던 사람들이었다. 진심으로.
그런 친구가 비행기를 타고 나를 만나러 온다고 했다. 처음은 현재였다. 현재는 지금도 우리 중에 제일 해외여행을 훌쩍 잘 떠나곤 한다. 먼 길을 온 현재에게 현지인의 삶도 보여주고, 여행도 잘 시켜주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마음이 가장 부풀어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내가 이젠 학교도 다니고 아르바이트도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머리를 짜내며 일정을 생각할 때 현재는 그냥 너희 집에 놀러온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현재는 베트남에 와 있을 때 내 조카들을 같이 봐주고 같이 밥을 먹고 장을 보며 지냈다. 나도 마음을 내려놓고 그냥 내가 잘가는 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내가 잘 가는 샾에서 머리를 하고 네일아트를 받으며 놀았다. 물론 찐친의 방문에 나도 용기 내어 몇 가지를 더 하긴 했다. 말로만 듣던 외국인 클럽에 가본다거나 당시 다니던 한인 입시학원에 아프다고 하고 수업 스케쥴을 바꿔 휴무를 만든 일이었다. 첫 번째 일탈인 외국인 클럽은 정말 우리나라 나이트 클럽인데 외국인이 밀집한 호안끼엠과 호떠이 근방에 이태원 같은 분위기였다. 둘은 신나게 놀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시끄러운 클럽은 결국 우리의 적성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신난 척 병으로 된 맥주 하나 들고 설치다가 큰 음악소리에 초점 잃은 동공 둘이 마주치고서야 둘이 한바탕 웃고 밖으로 나왔다. 휴무를 만들어 낸 것은 꽤 좋았다. 한국에서 가이드를 하다가 온 한인 오빠 한 명과 그즈음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었을 때인데,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 여행을 가보자는 마음이 맞았다. 그 길로 투어리스트 카페를 찾아가 슬리핑 버스를 예약하고 동시에 어플로 호텔을 예약했다. 6시간이 넘게 걸려 하노이보다 더 중국에 가까운 고산지대 사파(SAPA)로 갔다. 저녁에 일 끝나고 버스에 올라 아침 7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꽉 채운 1박 3일의 여정에 잠은 애진작 포기했다. 먼저 오토바이를 빌렸다. 짐은 어차피 많이 들고 가지 않았다. 뭐든지 가서 사자는 마음으로 갔다. 그땐 그게 나에게 국내 여행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아침 쌀국수를 인스턴트 쌀국수만 피해 들어가서 먹고 뷰가 가장 좋아 보이는 카페 테라스에 갔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스콜이 내렸는데 그 때가 마침 비가 쏟아지는 시간이었다. 잠은 못 자 몽롱한 상태에 좋은 사람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있으니 이게 꿈인가 싶었다. 그래서인가 여전히 그 때가 광경이 생생하다. 빨간 철제로 된 바닥과 지붕에 연신 내리고 튀어 오르는 빗방울을 슬로우로 찍었다. 뜨끈한 국물을 먹고 난 후에 습하지만 조금은 고산지대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카페 스어다(연유커피)에 좋아하는 인디밴드 음악을 틀어 놓고 산 언덕을 지나는 구름 조각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한적했던 그 행복이 그렇게 밀도 높은 행복이었을 줄이야. 사실 그 때도 알았다. 그게 행복인 것은.
야시장도 가고 폭포도 보러 가고, 소수민족 마을 투어에 무엇보다 구름 떼를 지나며 오토바이를 신나게 타고 다녔다. 우리가 간 곳은 히말라야 산맥의 끝자락이자 인도차이나 반도의 최고점이었다. 티엔 드엉은 직역하면 하늘로 가는 길이다. 하늘 길을 달리며 구름보다도 위를 지났다. 나는 의외로 길이나 운전 쪽에는 아주 소극적인 반면에 현재는 그렇게 운전을 잘한다. 그 때도 나는 오토바이를 혼자 운전하지 못해서 뒤에 타고 현재는 스스로 오토바이 하나를 몰았다. 그 때는 아직 다 소화되지 않아서 말을 다 못했다. 너무 행복하다고 네가 와서 정말 좋다고. 현재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 둘째언니와 그런 말을 했다. 현재와 와서 나를 증명해주고 간 기분이라고. 해외 생활이란 것이 특히 한인 사회라는 것이 그렇다. 나를 끊임없이 설명하고 또 설명 받아야 한다. 모두가 이주민이기 때문에 그 히스토리를 설명해가며 어떤 사람이었음을 정리해서 말하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진실함보다 허상을 많이 보고 듣는다. 어떤 사람이었냐는 것을 가장 한 번에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한국에서 지인들이 방문했을 때이다. 주변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단번에 원래의 그를 발견하게 된다. 본인의 설명과 지인들의 설명이 일치할 때 비로소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마음의 장벽을 허물게 되더라. 그런 점에서 현재는 나도 표현하지 못했던 가장 나 다운 모습을 꺼내 주고 갔다. 이 글을 읽을 지금도 그랬냐고 갸우뚱거리며 웃을 너를 내가 아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해주고 싶다. 현재는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나의 거추장스러운 포장들은 예쁘게 벗겨주고 나를 제대로 소개 시켜주고 갔다. 지인인증마크를 달아주었다. 그래서 한 동안 하노이 사람들은 현재를 찾았다. 아마 함께 있을 때 편한 행복을 보여줬던 나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통해 그 사람은 본다는 말을 한 번 더 이해하게 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