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노동의 나날들_ 05
들어온 주문 목록에 따라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차례대로 담기 시작하는 것은 주문 이행을 위한 기본적인 단계다.
단말기에 뜨는 정해진 위치로 가서 바코드를 찍고 바구니(토트)에 물건을 순차적으로 담으면 된다.
정해진 개수의 작업이 완료되면 다음 단계인 패킹이 시작되는 것이다.
물건을 담기 시작하기 전에 주문의 개수를 확인할 수 있고 예측되는 무게도 측정되어 나오는데......
정해진 원칙에 따라 주문을 내는 일은 인공지능이 한다.
여기서 정해진 원칙이라 함은 고객의 주문항목이 너무 많거나 10kg을 넘거나 하는 경우에는 주문을 분리해서 이행하도록 한다.
패킹은 결국 고객 입장에서는 하나의 주문이라서 합쳐서 하나로 나가야 하는데 그건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주문을 이행하기 위해 물건을 담는 인간인 크루로서는 만약 주문량이 15kg이라면 7.5kg씩 분리하는 것이 합리적임을 알지만 아직 거기까지 미처 진화하지 않은 인공지능은 10kg와 5kg로 분리한다.
11kg이라면? 10과 1.
인간이라면 당연히 10보다는 1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크루간에 미묘한 심리전이 벌어질 때도 있다. 무거운 걸 기피하고 가벼운 걸 선택하려는 자연스러운 본능의 발휘랄지.
그러나 이런 눈치게임이 너무 치열해지면 결국 탈이 난다.
나쁜 뒷말과 흉흉한 소문이 돌게 되지. 당연히 그럴 것이다. 누구인들 힘든 일을 하고 싶겠는가. 단돈 10원이라도 더 받는 게 아닌데.
이게 만약 나의 장바구니였다면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장바구니는 내 책임이니까.
하지만 이건 엄연히 일면일식 없는 누군가의 장바구니이고 일해야 하는 것은 나다.
시급을 받고 내 몸의 근육과 힘과 시간을 써서 다른 누군가의 일을 대신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무게는 눈치게임의 대상이 되지만 속도는 경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누가 더 빠르게 정확하게 짧은 시간 내에 주어진 장바구니 채우기를 완수해 포장까지 마쳐 내보내는가는 속도 빠른 크루들끼리는 경쟁의 대상이다.
누군가 기존의 기록을 갱신하면 세계 신기록을 깬 것처럼 좋아한다.
시간 단위 기록을 개선하려고 크루들끼리 으쌰으쌰하며 속도를 올리기도 한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면 느린 나조차도 갑자기 아드레날린이 솟아 더 빠르게 뛰다시피 해서 기여하려고 시간 줄이기에 애쓴다.
어떤 때는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이기도 하는데 갑자기 시간이 너무 줄어들거나 늘어나는 것도 기계가 오류나 이상현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맨날 느리다고 쪼는 캡틴에게 통쾌한 반기를 드는 의미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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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내가, 우리가 신경쓴다.
아니, 그렇게라도 의미를 만든다.
그래야만...........내가 타인의 장바구니를 채우며 그들의 시간과 육체적 노동의 지렛대로 소모된다는 공허함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