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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리미 Apr 21. 2024

6. 연애의 시작

미션: 직장 동료에게 고백할 것

연애의 시작

   업무 종료 시각 1시간 전부터 모니터 모서리에 표시되는 디지털시계를 거의 2~3분 단위로 확인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다. 57, 58, 59… 땡! ‘됐어!’ 정확히 퇴근 시간에 맞춰 의자 옆에 미리 준비해 놓은 백 팩을 들쳐 매고 일명 '칼퇴근'을 시행했다. 때마침 부장님이 자리 비운 틈을 타 눈치 볼 것 없이 빠르게 나올 수 있었다. 팀원들에겐 미리 전달해 두었기 때문에 지나가며 간단히 눈인사만 했다. 오늘따라 사무실은 왜 이렇게 조용한지 가방에 매달린 작은 미니언즈 캐릭터 피겨들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우리 회사는 분명 퇴근 시간이 사규에 명확히 규정돼 있고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 게시되어 있다. 하지만 제시간에 퇴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달 전부터 미리 분명한 사유가 있지 않은 한 칼 같은 퇴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입사 이후부터 지금까지 모두에게 이젠 거의 관행이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 ‘최저임금’이니 ‘주 52시간 근무제’니 해도 아직 늦게까지 근무를 해야 열정적이고 일을 잘한다고 암묵적으로 판단하는 우리 부장님 덕분이다. “난 야근하다 통로에 주저앉아 코피 흘리는 직원을 보고 싶네?”라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입버릇처럼 하시는 분이다. 그나마도 주말 근무를 지시하지 않는 게 어딘가. 이렇게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인사고과에도 반영되는 것 같다. ‘퇴근 하나가 첩보 작전 방불케 하듯 이렇게까지 숨죽여 가며 해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에 살짝 짜증이 났다. 분명 퇴근 시간이고 내 할 일 다 하고 당당히 퇴근하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잔소리는 여간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회사생활의 기본이면서도 당연한 걸 왜 눈치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난 간다. ‘분명 내일 한 소리 거하게 하시겠지?’ 고개 숙여 훈계를 들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목덜미가 아파온다. ‘그래.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내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평소보다 일찍 나왔기 때문에 쫓기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지만 엘리베이터는 왜 이렇게 높이 올라가 있는지. 조급했다. 사무실이 4층이라 걸어 내려갈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탑승하자마자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며칠 전부터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최적의 장소라고 봐둔 곳이 있었다. 강남에 ‘동경’이라는 바 형태의 일식집으로 조명도 은은했고 무엇보다 그다지 시끄럽지 않은 분위기가 제일 맘에 들었다. 난 칼퇴근 덕에 이미 2층에서 지인과 함께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었다. ‘또각또각또각’ 멀리서 들려오는 좁은 보폭의 빠른 걸음. 아까부터 1시간 가까이 2층 출입구 쪽에 시선을 둔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발소리에도 민감했다. 이내 발소리가 멈추고 그녀가 보였다. 지인이 먼저 손 흔들어 부른다.


   “나영아 여기!”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창가 쪽에 앉은 우리를 발견하고 콧등을 찡긋하며 웃었다. 빠르게 다가와 내 맞은편 의자를 잡아 뺐다. 내 앞에 앉을 수 있도록 지인은 대각선에 자리 잡아 그 옆에 자연스레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배치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짧게 웃으며 인사보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한숨 섞어 투정 부린다.


   “꼭 퇴근하려고 하면 일 시킨다니까 짜증 나! 차는 또 왜 이렇게 막히는지 버스 타지 말고 지하철로 올 걸 그랬어.”


   약속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은 게 미안했던지 핑계를 섞어 미안함을 표했다. 그녀는 허리 높이의 의자 등받이에 겉옷을 걸치고 자리에 앉았다.


   “많이 기다렸지? 오늘만큼은 정말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 늦어서 미안해. 대신 1차는 내가 쏠게. 주문은 했어? 이 골목 자주 왔었는데 이런 곳이 있었네? 술을 너무… 오랜만에… 반가워서… 그동안… 이렇게…”


   오늘 내겐 무척 중요한 임무, 그래 ‘임무’라는 말이 정확하다. 그녀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임무에 몰입했고 긴장감에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 좌불안석인 마음이었다. 이미 내 맞은편에 앉아 홍조 띤 얼굴로 얇은 입술을 연신 움직여 대는데도 두 손으로 귀를 막은 것처럼 웅얼거려 잘 들리지 않았고 주변 시야도 점점 좁아지는 것 같았다. 평소 같지 않게 가슴 한쪽은 또 왜 이렇게 가만있지를 못하는지 ‘쿵쾅’ 거리는 소리가 주변에 크게 들릴 것만 같았다.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 몇 년을 알고 지내며 보고 만났던 사이였는데 왜 이러지…’


   “선우 씨. 선우 씨!”

   “응 응? 아… 왜?”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불러도 대답도 없고.”

   “아 아니야. 뭐 좀 먹어야지? 뭐 먹을래?”


   식은땀에 등이 다 젖어 와이셔츠가 흥건했다. 계절 상 4월 초,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고 실내 온도도 적당 했기 때문에 분명 이곳이 더워서 흐르는 땀은 아니었다. 전혀 티 내고 싶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내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아 보일 게 분명했다. 얼마나 문질러 댔는지 유난히 번쩍거리는 테이블은 내 얼굴이 비쳐 어색한 표정에 붉게 보이는 얼굴이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난 내 외모에 불만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냥 생긴 대로 살자는 게 내 신조였고 대한민국 남자 평균이라고 스스로 자부했다. 하지만 새삼 오늘따라 난 왜 이렇게 생겼는지 아주 잠깐 부모님을 원망했다. 애꿎은 아랫입술을 뜯어내기 바빴고 물은 벌써 3잔째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3년 가까이 같은 회사,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며 직장동료로 시작해 이후로도 오랜 기간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만 각자 퇴사와 이직을 오간 후에도 친목 모임을 통해 가끔씩 만나 예전 이야기들과 업무 스트레스, 고민거리, 사는 얘기 등을 편히 나누기도 한 사이였다. 그간 서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전혀 사심 없이 만날 수 있는 말 그대로 오빠 동생 같은 사이였다. 호칭마저도 함께 일하던 시절 부르던 그대로 ‘선우 씨’, ‘나영 씨’라고 부르는 그저 전 동료나 지인 사이임이 틀림없었다. 요즘 말로 감정 1도 없는 사이였기에 만나면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술이나 밥 친구가 전부였다. 


   그런 그녀가 언제부터인지 내 가슴에 훅 들어왔다. 그게 언제인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떤 일이든 최종결정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시간은 필요했지만, 성격상 결정은 대부분 망설임 없었고 명확했었다. 결정에 이르기까지는 딱 한 가지만 봤다. 득과 실을 비교해 실을 조금 보더라도 득이 더 크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Yes로 이어졌고 누가 봐도 명백히 실이 크다면 과감히 포기했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결론에 도달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호흡 잘 맞던 머리와 가슴은 전에 없던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 아니라고 하지만, 가슴은 다르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시간이 흐른 뒤 서로 연인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까? 머릿속은 더 나아가지 못했고 계속 제자리에서 맴돌았다. ‘그래 나도 혼자 그녀도 혼자다…’ 그런 생각으로 몇 개월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나 자신도 미친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운명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민을 거듭하다 내 성격대로 상황을 가만히 분석해 봤다. 마침 서로 사랑하는 상대가 없었던 시기가 주요했고, 공백 기간 잦은 만남에 따뜻했던 여러 감정이 켜켜이 쌓인 걸까? 그러면서 자연스레 연결고리가 두텁게 형성된 게 아닐까? 


   경우의 수가 여러 개로 복잡하고 잘 풀리지 않아 고민될 때면 내가 자주 쓰는 방법으로 노트에 모든 경우의 수를 나열하고 그걸 다시 모두 연결한다. 그렇게 연결된 경우의 수들을 마인드맵 형식으로 가지를 이어가다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고려해 다시 하나씩 지워간다. 그렇게 줄이고 줄여 남은 가짓수를 보고 선택하면 조금 더 선택이 수월하다. 줄여보니 딱 두 가지 선택지가 남았고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Go 아니면 Stop만 남아있었다. 아주 단순했다. 지금 내 마음 그대로 감정을 전하거나, 눈 질끈 감고 없었던 일인 양 마음속으로 삼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최악의 수는 만약 그녀가 고백을 거절하고 냉정히 돌아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랜 시간 오빠 동생으로, 친구로, 고민 상대로 편히 맥주 한 잔 기울일 상대를 잃거나 혹시 관계가 유지되더라도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될 수 있다. 오랜 기간 함께 해온 시절이 있다 보니 이 부분이 고민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몇 개월간 애태우던 내 고민은 사라지게 된다. 오히려 고백하는 순간 선택은 이제 내가 아닌 그녀의 몫이 되고 그녀 또한, 선택의 고민을 해야 한다. 이기적이지만 그렇게 해야 했다. 이런 게 고백 아닌가? 난 용기 내고 넌 선택하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과감히 수용하면 된다. 큰 프로젝트를 끝내고 부장님에게 결과 보고를 앞두고도 이렇게까지 고민하진 않았던 것 같다. 보고서를 잘 쓰면 잘한 게 아닌 당연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그냥 한 소리 듣고 깨지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깨지는 데는 이골이 나기도 했다.


   혼자 고민 중 우연히 그녀와 함께 아는 지인과 속마음을 꺼내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는데 고맙게도 자리를 마련해 볼 터이니 고백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고 고민 끝에 다짐하며 서로 의기투합하게 된 것이다. 우선 그녀와는 단둘이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둘이 보자고 하면 왠지 의심 살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지인 덕분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마련했고 그게 바로 오늘이다. 그래, 어찌 보면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고백일 수 있다. 그냥 ‘나 너 좋다’라고 말만 하면 되는 거다.


   당일이 되자 약간의 자신감은 있어서인지 오전부터 긍정적인 기분이 들었고 느낌도 좋고 컨디션도 좋았다. 날씨마저 오늘을 기다린 듯 붉게 해가 지는 모습이 그림 같았다. 후우- 길게 심호흡 한 번과 함께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지인은 약속한 데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째려보듯 한쪽 입 꼬리를 한껏 올리고는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까부터 어느 순간 입을 때야 할지 타이밍을 이야기하다 나온 게 고작 눈짓에 화장실이었다. 이제 초록 불 신호가 들어왔고 서서히 출발했다. 브레이크는 이제 밟을 수 없다. 차는 이미 정지선을 넘어섰다. 일찌감치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려두고 지그시 밟으며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말해! 뭐 해? 조금 전까지도 그렇게 연습하던 그 말을 해! 어서!’


   “저… 저기 나영 씨.”

   “응?”


   배가 고팠는지 음식을 우걱우걱 입에 넣고 입술에 묻은 소스를 닦으며 대답했다.


   “음…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응! 뭔데?”

   “음…”

   “뭐길래 선우 씨 답지 않게 더듬고 그러지? 호호”


   그래, 평소와 다르게 오늘 난 나답지 않은 게 맞다. 표정부터 경직되고 말수도 현저히 적었다. 평소 말이 많기로 유명했던 난 여자들 사이에서도 수다를 좋아하는 탓에 ‘언니’라는 별명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그런 내가 이렇게 더듬거리고 쭈뼛쭈뼛 말하는 모습이 나답지 않고 낯설어하는 건 당연했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재킷 왼쪽 주머니에는 미리 준비한 네모난 목걸이 함이 들어있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조금 전까지 수시로 만지작거렸다. 고백하기에는 반지가 좋을 것 같았지만 처음부터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았고 목걸이가 받아들이기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매번 본인의 이름으로 된 이니셜이 새겨진 목걸이만 걸고 다니던 그녀의 목에 의미 있는 목걸이를 걸어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인도 같은 생각으로 동조해 주었다. 만에 하나 이 임무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이 목걸이는 아까 지하철 출구에 나오면서 봐두었던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던져 넣으리라 생각했다. 오로지 그녀의 목에 걸어줄 목적으로만 사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음…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는데… 아니, 언제부터 인지도 모르겠어. 분명히 그러면 안 되는 걸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영 씨가… 그러니까 갑자기 그런 건 아니고…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횡설수설했고 정말 바보 같았다.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응?”


   음식을 넣고 있던 손이 멈췄다. 여자들은 촉이 빠르다고 하지만 고백이라는 건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이다 보니 무척 궁금한 눈빛을 보냈고 들어 줄 테니 천천히 말하라며 기다려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답답해도 평소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재촉하지 않는 것이 그녀 답다고 생각했다. 다시 정신 차리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엔 제발 더듬지 말고 제대로 감정을 전달하라고 내게 지시했다.


   “오늘이 좋은 날이 될지 후회의 날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누군가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어제저녁에 잠들기 전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론은 하나였어. 용기 내자. 마음 안에 있는 것을 꺼내 보이자. 결과에 따른 모든 책임은 내게 있다.라고…”

   “응? 선우 씨 지금 무슨 말하는지 잘 모르겠어. 용기…. 책임?”

   “그러니까. 나 말이야. 앞으로 나영 씨와 마음으로, 머리로 함께하고 싶어. 내 모습이 웃길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오그라들지도 몰라. 미쳤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 용기 내는 거야. 서로 선우 씨, 나영 씨가 아닌 연인으로서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되었으면 해…. 미안해.”


   으- 바보같이 미안하단 말을 마지막에 해버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버려서 속상했지만 이미 뱉은 말. 그녀에게 내 진심이 잘 도달했기를 바랄 뿐이었다.


   “음…”


   고백과 함께 만지작거리던 목걸이 함을 테이블 가운데에 재빨리 올려 두었다. 손에 땀이 나서인지 검은색 상자에 손자국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혈관은 뜨거웠고 빠르게 피가 흐르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심장이 목구멍 바깥으로 나올 것만 같아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지은 사람처럼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말을 조금 더듬긴 했지만 그리 서투르지는 않았다고 이 정도면 됐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지금 내 표정이 그녀에게 어떻게 보일지 흔들렸던 내 목소리는 또 어떻게 들렸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이었지만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처럼 주변 소리가 뭉개지고 웅얼거리며 매우 작게 들렸다. 오히려 목 안쪽으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이미 화살은 내 손을 떠나 그녀에게 날아갔다. 과녁을 향해 날아간 화살촉이 목표에 제대로 명중했는지 까지 확인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웃지 않는다. 굳게 다문 입술로 표정을 멈췄다. 두 눈썹 사이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눈동자는 테이블 위를 향한다. 고민하고 있나? 당황스러워서 할 말을 잃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오로지 이 순간을 피하고 싶은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했다.


   “……”

   “……”


   잠깐의 고요함에 숨이 멎을 듯했다. 테이블 가운데 놓인 목걸이 함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던 그녀는 약간 당황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치아를 드러내며 볼을 오므려 보조개를 만들었다. 오늘따라 두드러진 볼 터치에 발그레해진 얼굴로 미소를 보내왔다. 그리고 테이블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놀리듯 웃었다.


   “하하하 뭐야. 그 얘기하려고 이렇게 뜸 들인 거야? 나 체 하겠어. 그리고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야? 호호.”

   “……”

   “선우 씨 정말 하하하”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닌 소개를 통해서만 여자를 만나다 보니 알아가는 과정에 사귀다 헤어지기를 자연스레 반복했다. 그렇게 연애 기간이 짧다 보니 가슴 뜨겁게 사랑해 본 기억도 별로 없었고 연애의 유통기한이 다 된 것처럼 헤어짐에 익숙해 별다른 감흥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랜 기간 가슴앓이하다 고백을 통해 여자에게 마음을 전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다려 달라거나, 안 되겠다 거나, 왜 이러느냐고 말하지 않았던 그녀. 놀리듯이 웃었지만,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준 그녀, 아니 이젠 내 여자친구에게 고마웠다. 아무런 감정 없이 오래 알고 지내던 아는 동생이 여자친구가 되는 기분은 뭐라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너무 이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보다는 절대 사랑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사랑 같은 느낌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연애의 속도가 붙었다. 불이 붙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맞잡은 손은 놓을 줄 몰랐고 가까이 마주 앉아 얼굴 닮도록 바라보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된 것이 신기했다. 어딜 가든 가게 문이 닫힐 때까지 대화가 이어지기 일쑤였고 최대한 늦게까지 하는 카페나 맥주 전문점을 찾아 돌아다니기 바빴다. 영화는 극장에 걸린 것들은 전부 다 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더 이상 볼 게 없을 정도로 많이 보다 보니 C 극장에서는 매년 VIP 멤버십 자격을 부여해 주었다. 좁은 노래방에서도 최신 곡은 거의 다 불러 봤을 정도로 붙어 있었으니 말 그대로 불타오른 커플이었다. 정말 하루가 모자란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내 인생에서 후회하지 않는 순간을 하나 꼽자면 그 고백의 순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간혹 여자친구에게 내가 그때 고백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고 어깨를 으쓱이며 턱을 들이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말없이 날 안아주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고백하던 그날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지인이 '임무의 날' 하루 전 전화로 미리 언급해 줬고 마음속으로 고민의 결과를 정하고 나온 날이라고 했다. 나 혼자 끙끙 앓으며 전전긍긍한 것 같았지만 아내도 전날 밤 깊은 고민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우리 시그널이 어느 정도는 맞은 게 아닐까. 아내도 나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가슴에 들어오긴 했지만, 선뜻 고백의 용기는 없었다고 했다.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했던가. 그 말을 난 증명 했고 그날 이후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렇게 삼 년 남짓 남부럽지 않게 진한 연애를 했다. 그러다 더 이상은 집 앞에서 헤어지는 것이 싫어 오랜 준비 끝에 국가와 법이 인정한 공식적인 ‘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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