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이유: '제 때'로부터의 자유
'낙오'라는 단어를 내 인생에서 몇 번이나 들어보았을까. 기억조차 잘 나지 않지만 학창시절 운동장을 돌 때, 극기훈련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기합을 받던 순간 정도가 흐릿하게 떠오른다. 그만큼 낙오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나는 정석대로 학창시절에는 적당히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적당한 대학생활과 학점유지를 하고서는 충분한 고민 없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몇 십번의 실패 후에 대기업에 취업을 했고, 다시 또 적당한 회사생활을 이어나갔다. 그 '적당함'을 유지하는 것도 분명 충분히 노력을 요하는 일이었고, 또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으니 그러한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그렇게 '적당하게 지속되는 나의 삶'에 대해 한 번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수가 옳다고 말하는 번지르르하게 잘 깔려있는 그 길을 걸으면서 한 번도 나는 그 길이 맞는 길인지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는 그 길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 길을 벗어날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그 길을 계속해서 달리다보니 하나 둘 씩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앞만을 바라보았다. 나와 같은 속도로 달리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안심이 되었다. '역시 내가 틀리지는 않았구나!'
서서히 그 길은 점점 좁아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나와 함께 달리던 몇몇은 앞서나갔고, 몇몇은 뒤떨어졌다. 나는 여전히 다수의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적당히 발 맞추어 달렸다. 때로는 앞선 무리에서 뒤떨어진 사람이 나와 함께 달렸고, 뒷 무리에서 뛰어난 누군가가 앞질러와 우리와 함께 달렸다. 정확히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좁아지는 그 길을 달리기 위해 경쟁했다. 문득 나는 우리가 도통 무엇인지 모르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 길을 달리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길이 나에게 맞는 길인지 그제서야 의심하기 시작했다.
졸업 후 바로 취업했는데, 그리고 이제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도 인생의 미션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제 때 승진을 해야했고, 제 때 결혼을 해야했다. 출산과 육아까지 나이대와 연차에 맞추어 이미 설정되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삶이었기에 또 보란듯이 미션을 달성하고 그렇게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이 레이스가 어쩌면 평생 끝나지 않을 것임을 눈치챘다.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마다 또 다시 다른 미션을 내 보일 것이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미션을 달성하는 데에만 허덕이다 끝이 나겠지, 그리고 어느새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기를 강요하는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으나, 우선 멈추어야만 막을 수 있음은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 레이스에서 자진해서 낙오되기로 결정했다.
그 전까지 나에게 낙오라는 것은 마치 금기와도 같았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이제 나는 스스로 무리에서 벗어나서 잠시 멈추게 되었지만 나만의 길을 새로 만들 수도 있게 되었고, 다시 일어나 나의 속도대로 꾸준히 달릴 수도 있게 되었다. 내가 가장 내려놓기 어려웠고, 가장 벗어나기 어려웠던 '제 때'라는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했다. 그 것이 내가 퇴사한 가장 큰 이유이고, 내가 퇴사하고 난 후 얻은 가장 큰 성과이다. 그래서 퇴사는 나에게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