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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n 11. 2024

아무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가츠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봤다. 영화 속에는 아빠가 모두 다른 네 남매가 엄마와 함께 지내고 있다. 엄마인 그녀는 짧게는 하루, 길게는 두세 달씩 식탁에 지폐 몇 장을 올려두고서 집을 비운다. 이날도 몇 주간 집을 비웠던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에게 선물을 안긴다. 그동안 덥수룩하게 긴 머리를 직접 다듬어주고 손톱 정리를 해준다.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하는 저녁 식사 시간에 그들의 웃음은 끊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엄마를 좋아하고 그녀도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며칠간 나가 집을 비운다. 어쩌다 애인이 생기면 아이들을 떠나 있는 기간은 몇 달로 늘어난다. 영화 속 아이들은 이런 일이 익숙한지 관객인 나와는 다르게 엄마가 없는 현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이들끼리 그들의 시간을 채워나간다. 몇 달 만에 집에 돌아온 엄마와 같이 잠든 다음 날 아침, 열두 살 된 첫째 아들 아키라는 일찍 눈을 뜬다. 아키라 옆에 누워있던 엄마의 눈꼬리에서는 눈물이 삐져나온다. 아키라는 말없이 엄마를 보고 있다. 엄마가 눈물을 닦으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키라는 눈을 감는다.


 엄마의 슬픔을 처음 마주했던 때가 생각났다. 한글을 유창하게 읽을 때였으니 초등학교 삼사 학년 쯤 되었을 것이다. 술을 먹고 며칠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다 지칠 때면 뒤채에 엄마와 지내던 곳으로 갔다. 가서 엄마의 물건을 뒤졌다. 맨정신의 엄마가 내 손을 자기 무릎에 올려놓고서 발라줬던 새빨간 매니큐어. 매니큐어 뚜껑을 돌려 열었다 닫으면 아세톤 냄새가 금세 주변에 진동했다. 화장대 서랍을 열고선 반지 몇 개를 꺼냈다. 반지 중에서 내 손가락에 맞는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엄마가 쓰던 스킨과 로션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다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으면 로션을 찍 짜서 손등에 발라보기도 했다. 그것들을 만지는 순간만큼은 엄마가 보고 싶지 않았다.


 술에 취한 엄마가 나간 지 사일 째 되는 날이었다. 엄마는 집에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다. “네 엄마는 대체 어디 있다니, 죽은 거 아니니.” 할머니의 말이 너무나도 무서웠지만 그것을 정말 무서워하는 순간 사실이 될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무서워질 때면 나는 더 집요하게 엄마 물건을 뒤졌다. 그러다 엄마가 만지지 말라고 했던 엄마의 일기장을 손에 넣었다. 화장대 밑 서랍에는 스무권이 넘는 노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에는 표지에 ‘꽃꽂이 수업 정리’라는 글씨가 네임펜으로 쓰여있었다. 노트 안에는 꽃의 줄기와 꽃병과의 배치, 줄기의 길이와 균형 등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틀림없이 엄마의 글씨였다. 글씨가 적힌 종이 위에 손바닥을 올려두었다. 꼭 글씨가 만져지는 것만 같았다. 다음으로 꺼낸 노트에는 흘겨 써진 글씨가 가득했다. 곳곳에 글자가 번진 흔적이 보였다.


‘시어머니가 집을 나가자 시아버지가 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 집구석은 정말 질리는 곳이다. 남편이라고 하나 있는 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혼자다.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독한 외로움, 나는 그 가운데에 있다.’


 그 문단을 읽자마자 울음이 터졌다. 거의 한 시간을 울면서 입고 있던 반팔티에 흐르는 눈물과 콧물을 닦아서 상의가 모두 젖었다. 나중에는 너무 울어서 얼굴이 벌게지고 탈진 상태까지 왔던 것 같다. 내가 없어진 줄 알고 집 안과 동네를 찾아다니던 할머니가 뒤채에서 울고 있는 날 발견했다. 할머니는 내게 왜 울고 있냐고 묻지 않고 나를 무릎에 앉혀 안아주었다. 사실은 엄마 일기를 봤어 할머니. 아빠가 엄마를 버린 것 같아. 엄마의 시아버지도 죽어 버렸대 엄마가 너무 외로웠대 그게 꼭 내 탓인 것만 같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이 말들을 하고 싶었으나 모두 가슴으로 삼켰다. 엄마의 슬픔과 고통이 그대로 적힌 그 문장은 열한 살의 나를 그대로 통과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도 책가방을 메고 집에 가는 길에도 친구들과 있을 때도 불현듯 지독한 외로움 가운데에 있다던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는 늘 예고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간 술만 먹은 탓인지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집에 온 날부터 엄마는 축 처진 몸으로 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느릿한 걸음으로 엄마는 시장에 갔다. “민주야 너 좋아하는 젓갈 사 왔어.” 집에 도착한 엄마는 계란찜을 하고 무국을 끓이고 시장에서 사 온 명란젓과 낙지젓, 어리굴젓을 반찬으로 내놓았다. 시장에서 사 온 그대로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마늘과 쪽파를 다지고 거기에 참기름을 둘렀다. 그럴 때면 내가 있는 안방까지 고소한 향이 흘러 금세 군침이 돌았다. 명란젓을 넣어 만든 물컹한 계란찜을 한입 먹고, 샛노란 조가 군데군데 박혀있던 밥을 푼 내 수저 위에 엄마는 어리굴젓을 올려놓았다. “여름이면 땀을 많이 흘리잖아, 물을 많이 먹어야 하거든. 그냥 물을 많이 먹을 수는 없고 짭짤한 젓갈이나 짠 반찬들을 먹으면 좋아.” 그동안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건지, 엄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 묻고도 따지고도 싶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물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없는 시간 동안의 그리움,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분노와 엄마의 행방에 대한 궁금증보다 급한 것은 당장 내 앞에 있는 엄마의 관심과 애정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아홉 살 때일 것이다. 그 당시 엄마가 만났던 아저씨는 키가 컸고 얼굴이 하얀 사람이었다. 그는 엄마와 나에게 친절했고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 나는 그 아저씨가 좋았다. 아저씨는 우리를 만나러 올 때 늘 깔끔한 양복을 입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나를 데리고 도봉동에 있는 아저씨네에 간 적이 있다. 무엇을 타고 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집이었던 역곡에서 거의 두 시간 가까이 걸린 만큼 멀었던 건 확실하다. 그곳은 아저씨 형네 부부가 사는 곳이라고 했다. 그 집은 거실이 넓게 트인 아파트였다. 거실 군데군데 멋지게 생긴 청자 같은 도자기들이 있어서 엄마는 내게 걸어 다닐 때 조심하라는 당부를 했다. 아저씨와 엄마, 형과 그 아내가 거실에 둘러앉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진행됐고 종종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따금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만 알 수 있는 긴장한 엄마의 얼굴이었다. 지루했던 어른들의 이야기가 끝나고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별말 없이 그저 수저와 젓가락이 그릇들과 부딪혀 쨍, 쨍, 하는 소리가 그곳에 채워졌다.


 그날 이후 나는 아저씨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엄마야 따로 아저씨를 만났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저씨를 만난 기억이 없다. 도봉동 그 집에서는 아마 아저씨와 엄마 사이의 재혼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그 자리가 있기 일주일 전 아저씨와 엄마는 똑같이 우리집에 찾아왔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외삼촌이 있는 자리에서 엄마와 아저씨는 어른들의 불안한 눈빛을 받아내며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뒤 엄마는 도봉동 아저씨네 가족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나를 데려갔다.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는 아저씨네 가족을 만나러 가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아홉살 짜리 딸을 데려갔던 엄마는 어떤 마음이며 어떤 생각이었을까. 엄마에게 선택지는 하나가 아니었다.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갈 수도 있었을테니까. 하지만 엄마는 나를 그 먼 데까지 데리고 가는 선택을 했다. 술에 취해 종종 어린 딸을 방치하는 엄마였어도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의지이며 표현이었을까. 도봉동 아저씨네로 향하던 길에 내 손을 잡았던 엄마의 손바닥에는 땀이 차 있었다. 내 손을 잡으며 걸었던 엄마의 마음을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세 시간짜리 영화는 결말을 향해 가고 있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집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엄마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들만 있는 집은 음식물 쓰레기가 썩어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빨지 못한 빨래들이 가득 쌓여 아이들이 오고 갈 공간도 부족해졌다. 어느 날 오후 그 집에 있던 네 명의 아이들이 함께 외출을 나간다. 밖에서 우연히 마주친 꽃씨를 담아와 씨앗을 심는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물을 준다. 며칠 뒤 흙이 담긴 컵라면 용기에는 어린잎이 뚫고 나온다. 그것을 제일 먼저 목격한 아이가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러다 엄마 생각이 난 아이는 서랍 속에서 돈이 든 봉투를 꺼낸다. 아이들의 엄마가 나눠 주었던 새해 용돈 봉투다. 그 봉투에는 ‘쿄코짱에게, 엄마가’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그 글자를 한참이나 쳐다본 아이가 봉투를 매만진다. 엄마의 일기와 엄마가 내게 차려준 저녁과 땀이 차 미끈거렸던 엄마의 손이 떠올랐다. 영화 속 아이와 함께 전기도 가스도 끊긴 그 집에서 나도 엄마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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