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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n 30. 2024

마지막으로 고인 분께 인사하겠습니다

장례 삼 일차. 입관실에서 몇 분 전에 봤던 엄마는 이제 관 속에 있다. 장례식장이 있던 병원은 대로변 한 블록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도로에 세워진 운구 버스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대학교 남자 선후배 대여섯이 하얀 천장갑을 끼고 하얀 천으로 덮인 관을 싸맨 줄을 잡았다. 관이 꽤 무거웠는지 그들은 길을 꺾을 때마다 휘청였다. 관이 지나가는 골목에는 양옆으로 세단과 승합차들이 주차되어 있었으며 앞 유리에는 중고차 고가 매입이라든지 유흥업소 홍보 문구가 적힌 전단지가 와이퍼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수요일 오전 그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멈춰 서서 혹은 길을 걷다가도 다시 뒤돌아 대낮에 등장한 나무 관을 쳐다보았다. 어릴 적 술에 취한 엄마가 병원에 실려 가는 모습을 주위에서 쳐다봤던 사람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경인국도 끝 차선에 세워진 큰 버스를 당장 병원 앞으로 끌고 오고 싶었다.


벽제에 있는 화장터와 납골당은 부천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장례식장에서 나온 꽤 많은 사람이 차에 올라탔다. 가족과 친지 말고도 학교, 교회 친구들과 시어머니까지 버스에 타자 사십 인승의 버스가 꽉 찼다.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와 엄마 때문에 버스에 올라탄 이들 앞에서 보여야 할 어떤 모습. 그것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피로감이 몰려왔다. 엄마를 잃은 딸로서의 모습과 동시에 함께해준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그런 모습. 내 옆자리에 앉은 남편이 말했다. 장모님 사진 나한테 주고 좀 자. 그는 장례 첫날부터 엄마를 잃은 나보다 훨씬 더 바빴다. 상주 역할도 했으나 장례식의 당사자가 되기보다 이 의식이 제대로 진행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스태프에 가까웠다. 물론 그를 찾아오는 조문객이 있어 그들을 상대하기도 했으나 그 밖 대부분의 일들, 음식 체크와 장례식장 대금 지급, 시신 처리, 화장터와 납골당 예약 등을 그의 회사에서 파견해 준 장례지도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처리하기에 바빴다.


시체검안서에 적힌 엄마의 사망 사유는 ‘불상’이었다. 분류가 불가능한 죽음의 상태. 사체로 발견되었거나 사망 원인이 모호하거나 병사나 외인사의 구분이 불가능한 경우에 내리는 사망 사유다. 엄마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고 사람들이 떠난 뒤 얼마 뒤 그 장소에서 발견됐다. 장례 이틀 차였던 지난밤, 장례식장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형사들이 가슴 앞주머니 속 경찰 신분증을 내밀며 부검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일 발인도 하셔야 하고 하니까, 시간이 없네요. 사위 분이 내일 아침 일찍 저희랑 동행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법적으로 불상의 경우 부검은 필수입니다. 사인을 밝혀야 하니까요. 남편은 장례 마지막 날 아침, 새벽 내내 부의금을 정리하고 장례식장 대금을 처리한 뒤 형사들과 엄마를 실은 채 양천구에 있는 서울과학수사연구소로 갔다. 마지막으로 고인과 인사를 나누는 입관식 전에 시체를 깨끗하게 닦는 염습을 해야 했지만 시신이 오지 않아 계속해서 시간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세 시간 정도 흘렀을까, 저 멀리 복도에서 남편이 뛰어왔다. 도착한 남편이 나를 따로 불러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주야 나 잘 다녀왔어. 늦어서 걱정했지. 어머님이 우리 예상대로 술을 많이 드셔서 그니까, 간도 많이 부어 있으시고 그러셨대. 여성이 이 정도로 부어 있었다면 힘들었을 거라고 거기서 말씀하셨어. 딱 봐도 과음을 많이 하셨구나 알 수 있었대. 쇼크가 왔을 거라고 하셨어. 내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전달하는 그는 장례 치르는 것이 고됐는지 양 볼은 홀쭉 들어가 있었고 인중에는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이 진해져 있었다.  


그의 손을 잡고서 버스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는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도 의식은 또렷했다. 버스 창가 위의 주먹만 한 구멍에서는 후덥지근한 바람이 나오고 있어 자꾸만 잔머리가 이마를 간지럽혔다. 버스 안은 대학 졸업 후 몇 년 만에 만난 아이들이 작게 소곤대는 소리로 채워졌다. 나는 스물일곱의 상주였다. 나보다 어리거나 혹은 조금 많거나 하는 내 또래들이 장례식장을 채웠다. 버스는 꽤 시끌시끌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풉,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 곧이어 퍼억, 등짝을 때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마도 운구 버스 안에서 웃었다는 이유로 그 옆에 앉은 애가 웃은 애 등짝을 때린 듯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등짝을 맞은 애와 등짝을 때린 애가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다.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장터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화장한 뒤 벽제 추모공원으로 가서 엄마의 유골을 안치하게 될 것이다. 버스 화물칸에 실려 있던 관을 다시금 들어 화장터 입구까지 옮겼다. 큰 문이 자동으로 위로 올려지자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안이 보였다. 안에는 직사각형 형태의 좁은 개별 화장장이 수십 개가 일렬로 있었다. 개별 화장장 위에는 엘이디 전광판의 글씨가 빛났다. 전광판 윗줄에는 고인의 이름이 아랫줄에는 대기 중 혹은 화장 중이라는 문구가 깜빡거렸다. 문 앞에 서있는 검은색의 정장을 입은 여자와 관을 바퀴 달린 이동기에 실은 남자가 잠시 문 앞에 멈춰 엄마의 관 앞에서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유족분들 이쪽으로 오셔서 마지막으로 고인분께 인사해 주시면 됩니다’라는 여자의 말이 끝나자 문이 닫혔다. 엄마의 관이 저 문 뒤 너머로 사라졌다.


한 시간 정도 대기 시간이 소요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점심을 먹으러 사람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하면서도 엄마를 방금 화장터로 보내놓고 그곳에 있는 식당에 가도 되는 건지 밥을 먹어도 되는 건지 의아했다. 일 층에 있던 식당은 깔끔하고 넓었는데 조금 전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와서 배를 채우고 있는, 팔 왼쪽에 줄 몇 개가 그어진 상주 완장을 찬 사람과 까만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남편은 식당에 오는 인원을 체크하고 매점으로 가서 만원짜리 식권을 인원수만큼 구매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나와 남편, 그리고 엄마의 추도 예배와 마지막 날 입관 예배를 맡아준 목사님과 셋이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었다. 나와 엄마 사연을 얼추 아는 그는 민주가 고생이 많았다고, 재혁이 역시 힘들었을 텐데 대견하다고 거듭 말했다.


그는 내가 대학 시절 4년 내내 활동했던 선교 단체의 자문 역할을 맡은 이였다. 우리보다 스무 학번이 높은 선배였던 그는 대학 졸업 후 신학교에 갔다. 그리고서 모교 앞 상가 지하에 작은 교회를 열었다. 선교단체에서 행사나 모임이 있을 때면 그 교회가 곧잘 모임 장소로 쓰였다. 그는 나와 남편의 결혼 주례를 서 주었고, 대학 시절 내내 나의 엄마 안부를 물었으며 나와 엄마가 반평생을 넘게 살던 외갓집에서 독립할 때 이사비를 통장에 부쳐주었던 사람이다. 그때 내가 스물 넷이었다. 독립을 앞두고 이사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엄마는 이사가 별거냐며 많은 짐을 차도 없이 혼자서 옮긴다고 억지를 부렸었다. 당장 이사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짐은 여전히 옮겨지지 못한 채 남아있었다. 추운 겨울,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엄마가 구르마 손잡이를 잡고 하루에도 스무 번 이상을 걸어서 십 분 거리의 이사 갈 집으로 짐을 옮겼다. 나 역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추위에 볼이 벌겋게 트도록 집을 오갔지만 물건을 옮기기에 구르마는 너무 작았다. 때마침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묻는 연락이 온 그에게 나는 목이 매여 한참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기다려 이야기를 다 듣고선 민주야 꼭 용달이라도 불러라, 네 계좌로 돈 붙였다,라면서 내게 보내 준 돈이 육십이었다. 그 돈으로 나는 용달을 불렀고 인도 위에서 구를 때면 유난히 바퀴가 덜덜거리던 그 작은 손수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는 엄마가 편하게 가셨을 거라고 했다. 늘 보여주었던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영숙 어머님이 이 땅에서의 삶이 녹록지 않으셨을 거라고. 하지만 이런 딸과 사위가 있어서 든든하셨을 거라고. 분명히 더 편한 곳으로 가 계실 거라고 했다. 가정을 꾸린 민주를 보고 편하게 눈을 감으셨을 거라고. 그가 틀릴 리 없었다. 나와 엄마를 잘 알고 내게 늘 손을 내미는 어른이었던 그가, 내게 늘 권위를 가졌던 그의 말이 이번에도 틀릴 리가 없었다. 편한 곳에 있을 거라는 엄마의 죽음에 대한 그의 평가를 나는 덥석 받아들였다. 어머님께서는 평안히 안식을 누리고 계실 거 다 민주야. 이 땅에서의 삶이 고되셨잖니. 테이블에 앉아 수저를 든 채로 그의 말에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그래요 그럴 거예요. 엄마가 정말 그랬겠죠. 내 입으로 그렇게 말하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다. 엄마는 더이상 술 때문에 고생을 안 해서 편하고 나 역시 엄마를 따라다니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잘된 일인가. 나는 깊은 곳에서 기쁨을 억누르며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죄스러웠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식당에서의 내 모습. 그게 유난히도 많이 떠올랐다. 엄마가 죽을 때 얼마나 괴로웠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안식을 누릴 거라는 편하게 갔을 거라는 그 말을 덥석 물었느냐고. 죽는 순간 자신을 구해줄 딸을 떠올리진 않았을 지 얼마나 숨이 막혔을지 무서움에 떨었을지 알지도 못하면서. 평안함과 안식이라는 말로 그 죽음을 퉁칠 수 있냐고. 사실은 엄마가 죽은 게 속 시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딸인 네가 편안한 죽음이라는 불확실한 그 말에 동의하면 안되는 것 아니냐고. 죄책감이 커질 때마다 눈앞에 자꾸만 엄마가 나타났다. 입관식 때 보았던 핏기 없는 엄마의 얼굴과 죽어있던 몸이 자주 떠올랐다. 밤이 되면 잠에 들지 못했고 어두울 때마다 떠오르는 엄마의 얼굴 때문에 한동안 새벽에는 화장실을 가지 못했다. 그럴 때면 나는 죽음이 찾아온 엄마의 상태를 그리며 숨을 참아보기도 했고 간이 위치한 오른쪽 배 밑을 세게 누르며 얼마나 아픈지 느껴보았다.


10월 말 벽제는 유난히도 추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꺼운 패딩이나 코트를 입고서 겉에 숄을 걸치고도 덜덜 떨었으니까. 식당에서 식사를 마친 사람들과 함께 공동대기실로 갔다. 대기 시간이 유난히 길어지자 나이가 지긋한 여자들의 대화 소리 또한 커졌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 엄마를 영숙이, 라고 불렀던 사람들. 아이고 별일이다, 벌써 이렇게 추우면 12월은 어떻게 견딜까. 날이 추워지니까 죽는 사람도 늘어나는가 봐. 그럼, 날이 춥고 안 춥고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맘때면 늘 노인들이 하나둘씩 가잖아. 내 딸네 시댁도 이번에 시할머니 외할머니 줄초상을 치렀어. 그때 갑자기 8번 관망실에서 고 이영숙 님의 화장이 시작될 거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고 앉아있던 사람들과 함께 급하게 관망실로 이동했다. 그곳은 관망실 별로 대여섯 명이 들어가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가 있었으며 벽 한쪽 면은 관이 불에 타기 전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유리로 되어있었다. 8번 관망실. 관이 화로에 들어가는 게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화로에 들어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아서 그런지 눈이 시렸다. 한동안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관망실 안에서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 안 피곤하세요. 내가 뭘, 네가 피곤하지. 그나저나 솔이는 잘 있니? 큰언니가 봐주고 있는데 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하다 얘, 그 어린애를 여기까지 어떻게 데리고 와. 가면 꼭 감사하다고 해라. 그때 내 앞의 여자가 성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얘, 민주야. 내가 일산 이모라고 불렀지만 이모라고 부르기에는 할머니에 가까웠던 여자. 어릴 때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왔던 그를 엄마는 언니라고 불렀었다. 엄마 왜 저 할머니한테 언니라고 불러? 라고 묻는 내게 엄마는 엄마가 항렬이 높잖아, 그래서 그래. 라고 답했다. 내게는 일산 이모였던 그는 말투가 살갑진 않았어도 유난히 엄마를 찾았다. 엄마가 버릇없이 말할 때면 얘가 아주 지질 않네 언니를 이겨 먹을라고? 라며 받아치면서도 엄마 옆에 자리를 꿰차고 앉아 끊임없이 말을 시키고 엄마의 등을 두들겼다. 명절에 엄마가 술에 취해 보이지 않으면 영숙이 어딨니 영숙이. 하며 제일 먼저 찾는 것도 그 이모였다.


얘, 민주야. 니네 엄마 도대체 어떻게 죽게 된 거라니? 어? 길에서 죽었어 집에서 죽었어 어디서 죽었니? 술 먹다 그랬니? 네 애미가 바보야, 바보. 바보라니까.

너도 알지, 왜 그렇게 산 거니 네 애미. 바보다 바보. 바보야 아주 그냥.


안타까움과 속상함을 넘어서 화가 서려있는 얼굴이었다. 쉰일곱. 다른 이들보다 이른 죽음을 이렇게 갑자기 맞이한 게 엄마의 탓이라 여겼던 그는 엄마가 없으니 나를 혼내고 있었다. 네 애미가 바보지 바보, 라는 말을 끝으로 그의 말은 끝이 났지만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작은 관망실 안을 두둥실 떠다녔다. 무엇보다 내 옆의 시어머니는 그 말을 듣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놀란 눈을 하고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녀는 내게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한 채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녀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정확히 몰랐다. 장모님이 평소에 지병이 있었고 그게 악화됐어요, 라고 시댁에 전했다는 남편의 말을 내가 전해 들었을 뿐이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술을 먹는 지 그녀는 몰랐다. 나는 결혼 이후 그녀가 그걸 알게 될까봐, 우리 엄마가 얼마나 술을 많이 먹고 자주 먹는 지 알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게 밝혀진다고 나를 내치거나 나쁘게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으나 엄마는 내 치부였으니까. 갑자기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계속 혼잣말로 바보다 바보, 라며 중얼거리는 그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여기에 제 시어머니 계세요, 그만 하세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맞춰지질 않길 바랐던 내 엄마 대한 퍼즐. 시어머니는 그 퍼즐을 맞췄을까. 남편의 가족에게 나는 언제나 세네 피스가 부족해 맞추지 못하는 퍼즐이 되고 싶었다. 일부러 엄마의 사정을 그들에게 숨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솔직하게 다 말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의 질병에 대해 내가 곤란함을 갖고 있다는 걸 잘 아는 남편은 그것에 대한 소통은 전적으로 자기가 맡아서 한다고 했었다. 민주 어머님이 술을 좀 드시는데 종종 많이 드실 때도 있고 건강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남편이 시댁에 한 이야기라며 내게 전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였다. 상견례 때 자기 말만 하던 그 사돈,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자기 연민이 가득해 보였지만 혼자 딸을 키워서 그런 거라 생각했던 그 사돈, 하지만 결혼식날 갑자기 아파서 오지 못했던 그 사돈, 그러다 갑자기 죽어버린 그 사돈에 대한 의아함을 이제 풀 수 있게 된 걸까. 내가 어떻게 해서든 감추고 싶었던 내 치부, 엄마의 알콜중독과 그로 인한 죽음이 이렇게 밝혀질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을까. 하지만 그 뒤 시댁 부모님은 내게 한 번도 엄마 이야길 꺼낸 적은 없다.


한두 시간이 흘렀을까. 수골실에서 엄마의 유골이 담긴 함을 받았다. 남자 대여섯이 낑낑대며 들던 그 관 속의 엄마는 이제 유골함 안에 든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엄마의 유골함을 들고 내가 버스로 이동하자 내가 타려는 버스 뒤로 쭈욱 줄을 선 차들의 매연으로 가득했다. 버스에 타는 내 어깨를 매만지고 민주야, 라고 말하는 내 친구들. 그 손짓은 사실 내게 별 의미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그 어떤 위로나 안타까움으로도 전달되지 못했다. 정작 내가 이 상황, 엄마가 죽었고 그 뼛가루를 들고 있는 이 상황을 아직까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몰랐기에 엄마가 죽었다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반응도 내게는 정확하게 다가오지 못했다.


화장터에서 가까운 납골당에 도착하자 삼일 동안 함께 했던 삼십 대 중후반의 장례지도사가 말했다. 미리 납골당에 좋은 자리를 맡아달라고 장례 첫날 연락을 드려놨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따님 눈높이의 4단, 크리스천들이 모여있는 코스모스홀에 안치되실 겁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랬듯 그의 모든 발화에 어떤 감정을 조금도 싣지 않고 정보전달에만 충실했다. 오늘 아침 부검을 마치고 온 엄마의 시신에 염을 한 그가 나와 남편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신이 훼손이 좀 된 상태였던 건 아시죠, 부검을 했으니까요. 최대한 깨끗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상처 부위는 덮고 보이지 않게 잘 묶었습니다. 최대한요. 장례 삼일 동안 이곳에서 모든 절차를 도와주고 이끌어주던 이였다. 처음 만났으나 이곳에선 그는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납골당에 유골함을 넣었다. 유골함에는 엄마 이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출생일시가 우측에는 사망일시가 적혀있었다. 그 유골함 앞에 모두가 모여 인사를 했다. 그곳에서 나왔다. 바람이 찼다. 모두 버스에 오르기 전 나와 남편이 각각 한 사람씩 찾아가 지금까지 함께 해주어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납골당 앞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떠들고 있는 대학 동기들에게도, 납골당 구석에 모여있는 고양이들 주변으로 가서 귀여워 귀여워를 연발하던 교회 동생들에게도, 내 옆을 바짝 붙어 따라다니던 시어머니에게도, 사흘 내내 부의금을 받아주던 형부들에게도, 마지막으로 운구 기사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버스에 올랐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막 구개월이 된 아이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아이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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