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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Sep 28. 2024

’아까운 내새끼‘ 라는 섬뜩함

한국에 돌아온 다음 날 첫째가 입원을 했다. 열 살 아이는 하루종일 내가 옆에 있어도 나를 찾는다. 내가 머리맡에 있으면 옆으로 오라고, 같이 누워있으면 팔을 긁어라 머리를 만져라 다리를 주물러라, 여러가지 주문을 해댄다. 24시간을 옆에 붙어있으면서 세끼와 간식을 챙기고 같이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내도 ‘엄마가 필요해’ 라고 말하는 아이. 그도 그럴 것이 둘째 동생이 태어난 뒤로는 이렇게 엄마와 둘이서 며칠씩 있는 시간이 없었다. 있더라도 금세 엄마는 동생 차지가 되었고, 신경을 쓴다고 썼으나 아이에겐 그게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레고를 만들던 아이는 ‘이머얼젼씨이!’라고 소리를 치며 나를 찾았는데, 눈 앞에 바로 있던 블록이 보이지 않아도 이멀전씨, 블록이 부서져도 이멀전씨, 엄마가 자기 말고 다른 것에 집중해 있어도 이멀전씨. 이곳 병동에서 아이가 말하는 긴급상황이 어찌도 많이 발생했는지 일일이 대꾸하느라 나 역시 진이 빠졌다. 그래도 이런 시간이 또 언제 주어지겠나 싶어, 아이 혼자 읽을 수 있는 책도 같이 누워 한 문장씩 나눠 읽고, 이제는 몸이 제법 큰 아이를 휠체어에 앉혀 밖으로 데려가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발목이 아프다는 아이의 발목을 마사지해주고, 오른손으로 링겔을 바꾼 아이의 서투른 숟가락질을 도와주었다.


여행지에서 두 자매의 눈과 귀는 모두 엄마를 향해 열려 있었다. 누가 엄마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누가 엄마의 손을 잡고 걸을 것인지에 혈안이 되어있어, 아이들은 비행기와 음식점과 길거리에서도 자주 다투며 울었다. 그때마다 한숨이 푹푹 나왔지만 뭐 어쩌겠는가, 엄마가 좋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어르고 달래 겨우겨우 순번을 정해서 내 손을 번갈아 가며 잡고 내 옆을 시간을 정해가며 바꿔 앉았다. 그래도 그 와중에서도 첫째 솔이는 항상 현이 보다 더 적은 지분으로 엄마를 차지했다.


여행 가서 아이의 열이 이틀 이상 떨어지지 않았던 날 밤, 꿈을 꾸었다. 아이가 죽는 꿈이었고 내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내가 어떻게 키운 아이인데, 하며 내 아까운 딸, 이라며 울부짖었다.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는지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나를 위로하러 온 이들을 뿌리치고 당장 아이를 살려내라며 소리를 치며 떼굴떼굴 굴렀다. 그리고 꿈에서 깼는데 꽤 오랫동안 눈꼬리에 눈물이 고여있던 탓인지 눈을 비비자 눈 주위 피부가 따가웠다. 곧장 첫째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가 아이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아이의 가슴팍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듣는데 열이 나는 아이의 몸은 뜨거웠고 눈물이 뚝뚝 흘러 아이의 옷을 적셨다. 그리고 펜을 들고 노트에 적었다. ‘아이를 잃고 가장 먼저 한 말이 ‘아까운 내새끼’ 였다.’ 슬프거나 상실로 인한 황망함이 아니라 아까움과 내새끼, 라는 단어가 갖는 어딘가 모를 섬뜩함이 쉬이 떠나지 않았다. 꿈을 꾼 후 생각했다. 나의 육아와 돌봄은 필연적으로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모든 말의 시작과 끝이 ‘엄마’ 였던 아이는 금방 잠에 들었다. 이제는 발 사이즈도 나와 비슷해지고 나보다 새끼발가락과 새끼발톱은 더 커진 아이. 그래도 아직 아기처럼 쌕쌕 숨소리를 내며 잔다. 이번 여행을 다녀오며 아이가 아픈지라 여간 마음이 심난한 게 아니었다. 괜히 그 먼데 까지 아이를 데리고 가 아프게 만든 것은 아닌지, 성공적인 여행이 되지 못했다는 실망감과 제 때에 처치를 받지 못해 아이가 입원까지 했다는 사실이 나를 위축시켰다. 되도록이면 시댁 도움도 받지 않고 어떻게든 아이를 케어하려고 했으나 아이 둘에 일까지 하는 내가, 남편과 둘이 그것을 감당하기란 불가능했다. 싫은 소리를 들을까봐 내내 말하지 않다가 아이 병간호를 위해 병원에 와달라는 요구에 시어머니는 곧바로 응했고 아이는 할머니가 집에 다시 돌아간 날, 할머니가 보고싶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먼 데까지 가서 아이를 왜 아프게 만드냐고,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그는 내게 그런 늬앙스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내서 아이를 보러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덕분에 회사도 가고 회사 일을 잘 마무리 짓고 올 수 있었다는 말에 그저 네가 더 힘들지, 나보다 네가 힘들지, 나는 괜찮아, 아이 아파서 네가 고생한다, 라는 말을 보탤 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처럼 보탤 말을 덜어내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아파 한 명이 병원에 묶여 있으니 둘째의 어린이집 하원이 늦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어린이집 다른 부모들이 도움을 많이 주었다. 부탁하지 않은 날에도, 현이가 혼자 있을 것 같다고 데려가 저녁을 먹이고 퇴근할 때까지 아이와 함께 했다. 그 덕분에 아이는 엄마가 없는 시간을 그래도 별탈없이 넘기고 있다. 같이 사는 온음 식구들도 현이 등/하원을 해주고, 돌봄을 해주었다. 현이가 다른 집에 가 있을 때 나는 병원에서 가져온 빨래를 하고, 솔이가 먹을 음식들을 싸고, 밀린 집안일을 했다. 도움의 손길들과 함께 걱정하는 그 마음들에 순간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시간들이 많았다. 그저 나 역시 누군가의 어려움에 함께 하는 사람이 되자고 생각하는 게 다였다.


아이가 아프니 건강도 취미도 내가 중요하다 지켜온 가치들이 희미해진다. 그 와중에 아픈 아이를 둔 부모의 마음에 조금 가 닿게 되면서, 누군가의 작은 말과 혹은 게시글이 어떤 이에게는 부럽기도 하고 속상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면서, 조심 또 조심, 하자는 생각도 든다. 지금 있는 일상이 내 능력이나 잘남 때문이 아님을 느끼면서 그저 주어진 하루를 덤덤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가 할 일임을.


내일 드디어 아이가 퇴원을 한다. 후유증 없이 아이가 깨끗하게 나을 수 있기를 바라며, 매서운 두 자매 사이에서 내가 잘 살아남기를 바라며, 아이들의 갈등 속에서도 나의 감정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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