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은 지는 좀 되었다. 나름 이 책을 보내주려 필사도 하고 다시 꺼내어 읽고 사람들과 책모임도 했으나 좀처럼 내게서 떠나지 않은 책이다. 자꾸만 뇌리에 남는 탓에 월요일 새벽에 알람을 맞추고 눈이 떠지면 쓰자, 해놓고서 출근 전 일찍 일어나 책에 대해 쓴다. 이제 이 책을 마음에서 보내고 다른 것을 품을 시간이 온 것.
이브엔슬러는 ‘아버지의 사과편지’로 알게된 작가다. 오랜 기간 아버지의 성착취를 포함한 물리적, 정서적 학대를 당한 작가는 그가 죽은 후 그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아버지가 되어 그의 고통과 인생 안으로 들어가 그와 자신을 위해 애도한다. 결코 위축되지 않는 눈으로 자신에게 남겨진 상흔과 가해자였던 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리고 그녀가 받지 못했던 사과를 그녀 스스로 받아낸다. 인간이 가진 상상이라는 능력이 글쓰기에서 어디까지 발휘될 수 있는가를 그 책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이번 책은 그녀가 쓴 수필과 시, 곳곳에 연재된 글들을 모아둔 것들이다. 개인적인 것으로 한정될 수 없는 슬픔에 접근하고 그 슬픔에 가닿는 방법에 대해서 결국은 그것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해 쓰고 있다. 슬픔에 가닿는 것은 자신을 나약하게 만들고 길을 잃게 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해지길 택하고 내가 가진 정체성에 변화가 있음에도 어떤 슬픔을 내 안으로 집어넣고 나아가는 일, 슬픔과 함께 하는 일과 그것을 증언하는 일을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한다. 고통이 머무는 곳. 국경선, 감옥, 홈리스 쉼터, 밀입국자 수용소, 난민캠프.
크로아티아의 난민캠프에서 자신의 가족들이 눈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본 이들, 콩고 내전으로 인해 몸 안이 찢긴 여자들의 자리로 가 그들과 함께 지내며 들은 이야기, 그 슬픔을 써내려간다.
엔슬러는 그들의 당한 피해와 아픔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을 넘어서 그들을 단순한 피해자로 가둬두지 않는다. 성기와 항문이 찢긴 채 대소변이 흘러나오는 몸으로 살기 위해 병원을 찾아온 여자들. 그들이 모여 태양 아래 춤을 추며 언덕을 오르고 결코 파괴될 수 없었던 그 영혼을 함께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이들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방법, 이들에 대한 관심과 어떤 움직임을 촉구한다.
“나는 그동안 그들과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방식으로 관계 맺었으며 스스로를 치유자이자 문제 해결사로 여겼다. 이 미친 현실과 잔인함 그리고 상실 속에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드러내지는 않았어도 속으로 절실한 통제 욕구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분석적이고 해석적이며 심지어 이 전쟁 통의 잔학함 속에서 예술을 끌어내고자 했던 이 욕구는 나의 무능에서 기인했다. 사람들과 온전히 함께 있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며 듣지도, 느끼지도, 이 진창 속에서 기꺼이 길을 잃지도 못하는 무능.” (134)
엔슬러는 그 자리에 가서야 슬픔을 통해 예술을 발견하고 누군가를 도구화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는 길을 잃기로 한다. 길을 잃지 못하는 그 무능에서 벗어나 자신이 녹아들 수 있고, 뒤섞일 수 있고,갑옷처럼 단단한 자아를 해방시켜 고통과 슬픔의 가운데에 자신을 놓고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제서야, 비로소 길을 잃어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그 슬픔에 대해 엔슬러는 다시 써내려간다. 세계 곳곳의 전쟁 속에서,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해 흩어졌던 많은 예술인들에게서, 학대 당한 채 찢어진 몸을 가지고 사는 이들에 대해서. 이제 엔슬러는 그들과 그들이 가진 슬픔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슬픔을 뒤섞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와 이 책을 읽는 모두는 드디어 그 슬픔을 껴안을 수 있게 된다.
글쓰기, 특히 자신의 고통 혹은 어떤 아픔에 대해 쓰는 이들이 읽는다면 곳곳에 멈춰설 곳이 많다. 나 역시 어릴 적 트라우마로 기인한 글쓰기를 하며 얻었던 평온과 실패, 쓸 만큼 썼다고 생각했지만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어떤 시간들. 그 시간에 안겨져 살아가며 느꼈던 여러가지 감정과 에너지원들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고 발견해낼 수 있었다.
엔슬러가 칠십의 나이로 낸 책이지만 어떤 문장들에서는 세차게 뛰는 맥박이 느껴진다. 그의 문장을 읽는 것은 꼭 피가 흐르는 혈관을 느끼는 일. 거칠면서도 아름다운 문장 속에는 그저 수려한 단어들의 나열이 아닌, 고통의 자리를 찾아 그곳의 있는 이들과 함께 하려는 용기가 만든 단단함들이 배열되어있다. 작가 본인이 가졌던 중독과 방황이 남긴 상흔 역시 이제는 아로 새겨져 그것은 그것대로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다 뜨지도 못한 채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회사에 출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일상. 곳곳에 육아와 노동이라는 과업과 누군가를 돌본다는 책임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지만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행운, 내가 거하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지리적 상황. 그로 인해 나는 별다른 일 없이 일상을 유지하지만 여전히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매일 밤 로켓이 날아다니고 폭탄이 터지고 끊임없는 학살, 기근과 정치적인 이유로 수감되어 가족과 떨어진 이들이 수없이 많이 생겨나는 이 세계에서 시선을 돌려 다른 세계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엔슬러가 열어주었다.
단순히 그들을 대상자로 보며 내가 가진 현실에 감사하는, 그들과 같이 열악하지 않은 환경에 감사하는 천박한 감상이 아니라 그 슬픔으로 인하여 지금 내가 발딛고 있는 자리에서 들어갈 수 있는 방법, 그들과 공명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여전히 나란 존재가 너무나 미약하여 이런 고민은 무력하다, 라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이 책이 기어코 가 닿으려고 했으며 껴안으려 했던 어떤 슬픔에 대해, 그 슬픔도 무너뜨릴 수 없었던 수많은 영혼들, 그들과 만나고 미약한 힘을 보태려는 이 마음은 결코 헛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오늘 누군가의 슬픔에 가 닿으려 했는지, 혹은 가 닿기를 실패했는지, 라는 질문으로 이 글을 마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