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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소이 Oct 22. 2021

기차 안에서 회고

  고속열차를 타고 목포에서 천안으로 가고 있다. 새마을호를 탔던 자정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잤다. 이상하게도 잠이 무한정 쏟아졌다. 꿀맛 같은 단잠으로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시간은 훌쩍 지났다. 남도에는 여름이 찾아왔다. 아카시아 향이 짙었다. 여행은 느림이다. 나는 느림을 배우려고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나는 차 안에서 남편과 아들에게 화를 내고 왔다. 그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고함도 치고, 여동생과 친정엄마에게 악다구니도 퍼부었다. 여섯 살배기 아들은 축구 수업을 마치고 레고 교실로 갔다. 하루에 한 번 레고로 무언가를 꼭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녀석이었다. 사전에 남편은 여동생 내외와 친정엄마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삼 주 동안 얼굴을 못 봐서 술 한 잔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었다. 오렌지 빛깔이 대지에 쏟아졌다. 아들은 레고로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다. 교실 안에 다른 아이들도 쥐 죽은 듯 열중했다. 남편은 정시에 퇴근했다고 연락이 왔다. 중간에 나와 아들을 태우고 여동생 집으로 갈 참이었다. 아들은 간간이 레고가 안 맞춰진다며 짜증을 냈다. 귓가에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내 심장은 쿵쿵 뛰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남편이 주차장에 도착했다. 아들에게 그만 가자고 말했다. 싫어. 다 만들고 갈래. 아들은 고집을 피웠다. 끝까지 만들겠다는 녀석을 엉덩이 한 대 때리고 일으켰다. 아들은 입을 삐죽 내밀고 나를 원망했다. 휴대폰이 또다시 울렸다. 심장은 계속 방망이질을 했다. 나는 뒤죽박죽이 된 기분이었다. 결국, 아들을 억지로 끌고 나오다시피 했다. 아들을 차에 태우고 뒷좌석에 실은 휠체어를 트렁크로 옮겼다. 그리고 아들에게 소리쳤다. 너 앞으로 꾸무럭거리면 블록교실 안 올 거야. 남편이 왜 애한테 화를 내느냐고 물었다. 나는 답하기가 싫었다. 또한, 남편은 왜 그렇게 늦게 나왔느나며 채근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식식거리며 화를 참느라 가슴만 쓸었다. 남편이 아들에게 상황을 물었다. 아들은 레고를 만들어서 늦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조금 늦는다고 말하면 될 것이지. 전화는 왜 또 안 했느냐며 말꼬리를 늘였다. 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남편 말대로 그런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빨리 나와야 하는데, 가족들이 기다리는데, 남편이 기다리는데, 저녁 밥상이 기다리는데, 애 핑계를 대고 가슴만 졸였다. 빨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 불안으로 가족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했다. 그리고 폭발했다. 어떤 상황 판단력도 그 순간에는 필요 없었다. ‘빨리’라는 개념만 만나면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빨리’가 내 목을 조였다. 주체할 수 없는 산만함으로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머릿속은 극도의 혼란으로 엉켜 있었다. 스스로 답답한 상황을 정리하는 훈련이 필요했으나, 삶은 나를 더욱 빠른 곳으로 밀어붙였다. 아니 ‘빨리’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그곳에서 나오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렸다. 되도록 그런 상황으로 가지 않기 위해 천천히 일상을 꾸미려 했으나, ‘빨리’라는 불씨는 화력만큼 삽시간에 내 온몸을 휘감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햇볕이 용광로 같던 팔월이었다. 배 밭에 농약을 주던 날, 백 미터가 넘는 농약 줄을 남동생과 함께 잡으며 아버지 일손을 거들었다. 아버지는 밭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농약 줄을 잡아당겼다 놓기를 반복했다. 농약을 주는 날은 눈이 따가웠다. 분수처럼 솟구친 농약은 배나무 고랑마다 특유의 약 냄새를 풍겼다. 농약 냄새는 고약해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버지에게 호되게 꾸중을 들었다. 아버지는 ‘빨리빨리’를 강조했다. 틈만 나면 빨리 안 하고 뭐 해. 늦게라도 꾸무럭거리면 주먹세례가 날아왔다. 아버지는 포악했다. 그리고 두 눈을 치켜뜨고 상기된 표정으로 나와 동생들에게 틈을 주지 않았다. 아버지를 보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지옥이었고 암흑이었다. 순수한 마음에 농사일을 도와주었다가 순식간에 맹수로 변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우리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아버지 포악성과 맞닥뜨리는 순간이면 우리 남매는 두 손만 싹싹 빌며 잘못했어요. 소리를 내뱉었다. 그게 살길이었다. 농약 그까짓 약을 조금 덜 주면 어때서 약 떨어진다고 농약 줄 빨리빨리 끌어당기고, 풀라고 소리치는 상황은 이해가 되면서도 아버지 모습을 두고 봤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고갯짓을 했다. 아버지는 왜 우리에게 틈을 주지 않았을까? 무엇이 아버지를 그렇게 헐떡거리게 하였을까? 보이지 않는 그 조급함으로 나는 강박장애에 시달려야 했다. 내게 아버지란 존재는 억압 그 자체였다. 가슴 졸이며 살았다. 빨리라는 개념은 분별력을 잃게 하고, 상황 판단력도 앗아 간다. 그건 폭력과 견줄만했다. 폭력은 인간의 순수성을 통제로 앗아가는 면도 있다. 내 정체성, 나는 누구일까?라는 존재성마저 상실했다. 나는 자유를 찾아야 했다. 틈이라는 공간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세상은 그 틈마저 내게 주지 않았다. 나는 방황했고, 상처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상실된 아픔 때문에 무엇으로 나 자신을 보상받아야 할지 고민했다.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신을 찾아 나섰지만 신은 침묵뿐이었고, 도시의 시스템은 나를 제도권으로 밀어 넣어 섬처럼 유유히 떠다니게 했다. 빠르고 편리한 것만이 행복은 아니었다. 그건 도시가 주는 환상이었다. 나는 이제 빠르고 첨단화된 것이 우리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또 다른 폭력이라 여긴다.

길 위에 선 사슴처럼 나는 지금 갈등한다. 그토록 떨쳐내고 싶은 고향을 다시 찾아가고 싶은 욕망이 용솟음친다.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다. 사람들은 최근 슬로시티라고 시골지역을 선정해서 느림의 미학을 체험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시골을 동경하지 않았다. 도시에 머무르면 다 잘 될 줄 알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옛날로 돌아가는 일이 버겁지만 부딪혀야 답이 나온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맞는 답이다. 내 비뚤어진 사고를 정면으로 보는 건 과거를 보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이제 시간 속으로 여행을 할 것이다. 목포를 다녀오면서 구슬 하나를 챙겨 왔다. 마음에서만 굴러다니는 구슬, 그 작고 오묘한 빛을 뿜어내는 동심 같은 구슬. 그걸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내 안의 여행이 마쳐져야 한다.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렸던 것처럼 내가 습득한 모든 걸 정면으로 바라보고, 용서해 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여행은 시작되었다. 잘 도착하면 된다. 이만큼이면 저만큼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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