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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Apr 04. 2024

고향에 돌아온 한의사

개원 이야기

우리 한의원 앞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나는 그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한의원에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엔 중학교가 하나 있다. 나는 그 중학교도 졸업했다.


이 동네에 3살 때 이사를 와서 27살까지 살았다. 주변에 있는 아파트들과 나이가 비슷하다. 그러니까 아파트들이 막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 이곳에 오게 된 셈. 안타깝게도 3살 이전까지에 대한 기억은 없으니, 이곳이 사실상 "진짜 고향"이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구분할 것 없이 어린 시절 모든 감정이 다 담겨 있는 동네.


설마 이곳에서 한의사로서 자리 잡게 될 거라곤 상상해보지 못했다. 오래된 한의원을 양수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에도 재밌는 일이 많았어서 차근차근 그 이야기를 풀어보고 싶다. 오늘은 내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서 보고 있는 '덕'에 대한 글이다.




남편은 한의원에 걸어 둘 이력 패널을 만들 때 꼭 초등학교 이름부터 다 적어야 한다고 했다. '그게 뭐 큰 의미가 있나? 내가 한의사로서 무슨 공부를 했고, 어떤 경력이 있는지가 더 중요한 거 아니야?' 실제로 일을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생각보다 환자분들은 내가 이 동네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더 기뻐하고 반가워하셨으니까. 


"원장님은 천안 분이신가 봐요."

"우리 아들/딸도 OO초등학교 나왔어요."

"원장님 OO고 출신이세요? 저도 거기 졸업했어요."


내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천안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많은 분들이 마음을 한껏 열고 다가와주셨다. 괜히 더 자랑스러워해 주시고, 반겨주시는 마음을 느낄 때마다 어찌나 뿌듯하고, 이곳에 자리 잡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른다.


"원장님은 천안이 고향이신가 봐요. 저는 OO시에서 살다가 이사 왔거든요."


이런 대화를 시작하면 치료자로서도 득이 많다. 어떻게 천안에 자리 잡게 되셨는지 들어볼 수 있고, 무슨 일을 하며 사셨는지를 비롯한 환자분들의 개인적인 역사가 술술 나오기 때문에. 그러다 보면 환자의 아픔에 대한 원인을 찾기도 쉬울 뿐만 아니라, 서로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 들면서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맡겨주셔서 치료해 나가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어렸을 때는 이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어린아이들도 너무 많아서 학교가 2부제, 3부제를 시행해야 할 정도였다. 항상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치던 곳이었다. 30여 년 사이에 사람들이 많이 사는 중심지가 옆동네로 옮겨졌고, 이제는 어린아이들 목소리를 듣기 어려운 동네가 돼버렸지만. 


점심시간에 어릴 적 살았던 곳 주변을 산책하다 보면 너무나도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 모습에 쓸쓸하고 낯선 마음이 든다. 많은 추억이 서려있는 공간들이 이제는 낡고 허름해 보일 땐 괜히 슬프기까지 하다. '내가 나이 든 만큼 너도 늙어가는구나...'


하지만 나와 만나는 환자분들이 하나 둘 늘어갈수록, 다시 이용하게 되는 우리 동네 식당이나 상가가 생길 때마다 동네가 조금씩 알록달록 해지는 기분이다. 전과 많이 변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인 건 여전하니까. 그렇게 조금씩 우리 동네와 다시 친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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