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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Apr 26. 2024

민감한 환자와 더 민감한 한의사

치료실 이야기

"아야! 원장님, 침이 너무 아파요."


침을 맞을 때 통증에 유난히 민감한 분들이 있다. 아프니까 긴장하고, 긴장하니 더 아파지는 악순환. 사실 나도 아픈 걸 너무 싫어해서 침을 살살 놓으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겁에 질려 있을 정도로 긴장하는 분들을 뵐 때면 치료하면서도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날카로운 바늘은 공격을 위한 도구가 될 수도 있지만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더 민감한 사람일수록 침을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몸이 공격당한다는 느낌을 무의식에서부터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두려운 마음을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 아니 어쩌면 마음에서 불쑥불쑥 올라오는 죄송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이렇게 말해본다.  


침이 들어갈 때 아플까 봐 무섭고 힘드시죠? 우리 함께 내쉬는 숨에 집중하면서 3번만 깊게 숨을 쉬어 볼까요?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시겠지만, 이 자극은 oo님을 해치려는 게 아니라 치료하기 위한, 이로운 통증입니다. 때때로 어떤 두려움은 '내가 무엇 때문에 두렵구나.'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크기가 줄어들죠.




세미님(가명)도 그런 분이었다. 침을 한 자리, 한 자리 놓을 때마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새어 나오곤 했으니까. 그런 분께서 어느 날엔 마음속 깊이 오랜 시간 안고 살아온 아픔과 상처에 대해 털어놓으시더니, 한약 치료까지 병행하게 됐다. 넉넉지 못한 경제 상황 속에서 큰 마음먹으셨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처방전을 적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약을 보내드린 다음날 이런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렇게 비싼 돈을 어렵게 지불하시고도 나의 보람을 위해 착실히 약을 챙겨 먹겠다는 환자라니. 그런 마음을 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환자를 진단해서 고민 끝에 처방을 내고, 약을 달이고, 포장하는 것까진 내 몫이다. 하지만 그 약을 제 때 챙겨 드시는 건 오롯이 환자의 몫. 요즘처럼 많은 게 빨리 변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한약을 따뜻하게 데우고 쓴 맛을 견뎌가며 매일 챙겨드시는 게 얼마나 수고로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렇기에 잘 챙겨 먹겠다는 환자분의 다짐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내 마음도 한시름 놓였다.


하루는 침을 맞으시던 세미님께서 이렇게 물어왔다.

"원장님, 제 한약에 잠이 잘 오게 하는 약도 들어있나요? 요즘 들어 중간에 깨지 않고 잠을 푹 자서 정말 편하거든요. 아닌가? 마음이 편해져서 잠도 잘 오는 걸까요?"


민감한 분들은 그만큼 몸의 조그만 변화도 금방 발견하는 능력을 타고난다.

"세미님, 한약을 드시며 일어나는 몸의 변화를 아주 잘 알아차리고 계시네요? 한의학에는 '몸과 마음을 하나'라고 보는 이론(心身一如)이 있어요. 남은 한약도 잘 챙겨드시면서 몸과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우리가 함께 관찰해 봐요."




오늘도 침을 맞는 내내 너무 아프다는 말을 연신 반복하시다가 갑자기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듯 말하셨다. "고구마 쪄 왔으니 꼭 드세요. 따뜻할 때 드셔야 할 텐데, 시간이 나실지 모르겠어요." 치료가 끝나고 탕비실에 가보니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구마가 봉지에 싸여 있었다. 그 고구마를 보며 혼자 드실 양에, 우리 한의원을 생각하는 마음을 더해 몇 개의 고구마를 찜기에 더 올려두셨을 세미님의 모습을 상상했다.


나였다면 침 치료가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한의원을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뜸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용기 내고 노력하는 그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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