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루너’
나의 스리랑카(싱할라어, Sinhalese) 이름이다. 발음을 잘못해 ‘아루나’라고 말하면 여자 이름이 되어버린다. 여자로 불리는 이상한 경우를 당하지 않으려면 항상 조심해서 발음해야 한다. 어쩌다 성정체성에 혼란을 주는 이름을 짓고 말았을까?
내가 이 스리랑카식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그 뜻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루너라는 이름은 현지어로 ‘이른 아침’이라는 뜻이다.
이른 아침, 어쩌다 남들 다 자고 있을 시간인 새벽에 깨서 우연히 일찍 시작한 하루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수면 부족으로 인한 몽롱한 두뇌 회전도 마음에 들고, 남들보다 조금은 부지런해진 것만 같은 착각마저도 든다.
대학생 시절, 용돈 좀 벌어보자고, 그리고 없는 집안살림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작고 허약한 몸을 이끌고 공사장 일용직 노동자로 일한 적이 몇번 있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날의 경험은 특별했다. 일이 힘들어서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일찍 일어나 바라본 세상의 모습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달라서 특별했다.
새벽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에 버스를 탔다. 그곳에는 의외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에 내가 잠들었던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 앉아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잠들사이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가 되고 싶었던 어른과는 달랐다. 몸에 맞게 재단된 최신 정장을 차려 입고 오피스에서 일하는 부류들과는 달랐다. 육체노동으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의 계층은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던 것일까? 그들은 시간대만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부류처럼 보였다. 서로가 마주치면 안되는 사람들처럼, 다른 시간대에 움직이는 사람 같았다.
인력소개소로 향하는 새벽시장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부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밖으로 나왔을 뿐이지만, 생경한 느낌마저 들었다. 일찍 일어난다는 건, 모두가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좋게 말하고 싶지 않다. (이제는 생각이 조금 바꿨다. 일찍 일어나 일해야하는 것, 상황에 따라 그들이 이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발버둥치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시간은 때로는 게으름의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잠이 늘어나면, ‘또 게을러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후속 조치를 취하곤 한다. 느닷없이 아침에 영어 학원을 등록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헬스장을 등록하기도 한다. 평소에는 하지도 않는 일을 일상에 추가해 게을러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물론 이 부지런함도 어쩌면 한국사회가 나를 길들여 놓은 규범일지도 모르겠다.
‘아루너’라는 이름에는 작은 바람이 담겨있다.
그리고 다짐도 담겨있다. 그 이름의 뜻처럼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부지런히 스리랑카에서 봉사하며 살아보자!'는 의미로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은 이름을 뿐이다. 나는 아루너라는 이름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행위를 부지런히 했다. 그래도 내 이름을 발음하면서 뜻도 되새겨 보면서 게을러지는 나를 다잡아 내곤 했었다.
우리는 어쩌면 부지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 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해 우리는 그렇게 부지런을 떨며 사는 걸까?
스리랑카의 삶은 내게 말하곤 했다.
때론 게을러지는 게 뭐가 그리 나쁜가?
세상이 내게 기대하는 것들을 맞추기 위해, 혹은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쉼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그런 내게 남는 건 축난 몸 하나뿐이다. 조금 베베꼬인 생각으로 바라본 한국의 경쟁사회는, 가진 자가 없는 자를 잘 활용해 먹는 방법의 하나로 보일 때가 많다.
스리랑카의 삶, 나는 봉사를 하러 왔지만 여기서 많은 것들을 배운다. 그들의 게으름에도 나는 오늘 배운다. 때론 조금 가난하더라도 이렇게 여유로워 보이는 스리랑카의 삶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
외지인들이 보기엔 스리랑카 사람들은 약간 게을러 보일 수도 있다. 이들 두고 분석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리랑카 지천에 널린 풍부한 과일나무에 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바나나와 코코넛을 비롯한 열매들이 눈만 돌리면 지천에 널려 있는 곳이 스리랑카 아닌가? 가만히 있어도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굶어죽는다 건 세상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날씨도 덥기 때문에 밖에서 잔다고 동사할 걱정도 없다. (물론 아주 극한의 경우만 고려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다르다. 스리랑카 현지인들 대부분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날 정도로 이들은 아침형 인간이다. 우리 주인집 가족들도 새벽 5시에 일어난다. 그 새벽에 일어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인다. 그들이 기상을 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란, 불경을 녹음한 테이프를 크게 트는 일이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나는 더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어 자연스레 눈을 뜬다. 잠시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침대에서 꾸물대고 있으면, 또다른 새벽잠 공격이 들어온다. 새벽 6시에 집 앞으로 지나가는 빵을 가득 실은 차가 요란한 멜로디로 아침 빵이 도착했다고 알리며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빵차는 나의 단잠을 두 번째로 깨운다. 이 빵차가 새벽부터 시끄러운 멜로디로 온 동네를 누비면서 돌아다니면,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와 아침거리를 사들고 집으로 돌어간다.
이렇게 5시에 불경 알람, 6시에 빵차 알람을 듣고 나면, 다시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 버린다. 이른 아침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나는 다행히도 새벽잠이 없는 스리랑카 사람들 덕분에 겨우 이름값을 해왔던 셈이다. 우리가 게으르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던 개도국의 사람들 덕분에 난 덜 게을러 질 수 있었다.
그 실수는 가끔 우리가 생각해도 이상한 잣대로 인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많이 가졌는가? 혹은 적게 가졌는가?’로 상대방을 판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개도국을 평가한다.
"저러고 사니 지지리도 궁상맞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가난은 그들이 게을러서 가난해진 것이라고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건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개인의 요인을 벗어나는 다양한 외부요인도 생각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많이 가졌다고 해서, 그들보다 꼭 행복하게 사는 것도, 올바른 방향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