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미리 말을 해야
친구들과 밤새 놀고 새벽에 들어오는 별봉이랑 마주쳤다. '어쭈구리'라는 생각이 들다 씨익 웃고 들어가는 녀석을 보니 웃음이 난다. 소싯적에 나도 뭐 할 말이 없지. 가르치지 않아도 어쩜 저러냐고?! 다음 달에 휴가를 또 나온다던데.
사무실에 일하다 전화를 했다. 별봉이는 자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고, 달봉이한테 전화를 했다. 곧 출장이라 저녁이라도 한 번 더 먹자고 했더니 "저자식 자느라 정신없어요"란다. 일어나며 메시지를 달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연락이 없어서, 퇴근을 조금 일찍 하려고 서두르는데 연락이 온다. 주인님 왈 "이것저것 잘 먹어서 오늘은 회를 좀 떠와요"란다. 그럼 수산시장에 가야 하잖아? 미리 말하면 미리 출발했는데 퇴근시간에 언제 수산시장엘 가나? 어차피 회를 안 먹는 달봉이는 연락이 없을 것이고, 별봉이는 만만한 엄마를 시키고, 배달은 내가 하는 거지. 아주 잘 짜인 시스템이구나.
지하철 타고, 버스 갈아타고 노량진 수산시장에 도착했다. 많이 바뀌었구나? 키오스크도 있고, 주변에 있던 포장마차도 없다. 배도 고픈데 오뎅하나 사 먹을 곳이 없네.. 주문을 했더니 사람이 많다고 30분이나 기다리란다.
장터네 나온 김에 여기저기 돌아다녀보니 깔끔하게 정리가 된 듯하다. 이층에 올라가 보니 튀김 파는 곳이 있어서 side menu라 생각하고 샀다. 그러고 보니 향이 솔솔 올라오는데 마을버스 타기가 좀 애매할 것 같다. 잘 쫌매놔야지 뭐.
마나님 메시지가 또 온다. "있으면 오징어 회도 좀 사 와~" 2층에 올라오는 동안 수조에 든 오징어를 본 적이 없다. 기후 온난화로 잘 안 잡힌다는 뉴스를 본 것 같은데.. 다시 주문한 가게에 가서 "오징어도 있어요?"라고 물어봤는데 표정이 조금 애매하다. 있긴 있는데 비싸단다. 회가 3인분에 9만 5천 원인데 오징어가 4만 원이란다. 후배 가족들하고 오징어 회 먹으러 온 적이 가물가물한데..
마나님 메시지가 또 온다. 바쁠 땐 전화를 하지 자꾸 메시지를 보낸다. "비싸면 사지 말고" 이건 무슨 소리냐? "먹고 싶은 걸 먹어야지"라고 답장을 했다. 가격을 말해봐야 먹을 거면서 잔소리만 떨어질 텐데 뭐. 배달맨 마음이지.
받아보니 정말 얼마 안 된다. 예전엔 1-2만 원이면 푸짐했는데. 실물 경기를 체감하는 것은 새삼 다르다. 나라 꼬라지가 거시기해도 먹을 건 먹어야지.
마을버스를 잘 내려서 나도 주문을 했다. "달봉아.. 엄마보고 라면 하나 물 조금만 해서 끓여달라고 해라. 지금부터 끓이면 된다"라고 말했는데 저 멀리 소리가 들린다. 흘려듣기로... 회 안 먹는 달봉이는 벌써 밥을 먹었단다. 주인공인 군인 별봉이는 배가 고프단다. 그 와중에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더니 마지막 주문자가 온갖 욕을 다 먹는 건가? 줄을 잘 서야 한다니까..
집에 도착했더니 별봉이가 이걸 먹어보겠다고 골라놨다. 어이쿠! 난 집에서 술을 안 마신다. 어쩌다 주인님 꼬임에 맥주를 잔으로 한두 잔 마시면 많이 먹는 수준이다. 별봉이가 골라 놓은 술을 따주면 "너 이거 다 마실수는 있냐?"라고 물어봤다. 내 소싯적보다는 훨씬 덜 먹는 것 같다. 마나님이 술을 잘 안 마시니, 나랑 섞여서 내 먹는 절반 수준이긴 한 듯하다. 독주를 소주처럼 먹으면 한 번에 훅 간다. 소주는 기분이 좋은 상태에서 더 먹다가 보면 슬슬 어지러운데 하더라도 맛이 가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하지만 독주는 속이 안 좋다기보단 슬슬 머리가 띵하니 어지러운데 하면 얼마 안 있다가 골로 간다. 건배도 하고 집에 있는 술을 보면 이런저런 설명도 해주고, 마실 수 있는 것과 관상용을 구분해 줬다. 요즘 술을 사면 거의 별봉이가 맛을 한 번 볼만한 녀석을 고르고 있다. 나이 먹고 가끔 별봉이랑 한두 잔 집에서 마시는 재미가 있을까 한다. 달봉이도 어쩌다 한 잔 정도 마시니까. 부러운 놈들 있을 거다. ㅎㅎ
몇 잔마시더니 소주랑 느낌이 다른가보다. 지난번 싱글몰트 줄 땐 홀짝홀짝 잘 마시더니 마오타이는 무겁나 보네. 덕분에 나도 한두 잔 마셨다. 며칠 있다고 또 마실 것 같은 분위기라. 녀석이 그만 먹겠다고 병을 닫아서 잘 두었다. 1월에 휴가 나와서 또 마시려나? 주인님은 역시나 이런저런 말이 있었지만 오징어 회 잘만 드시더구먼. 거봐 사길 잘했지. 이젠 슬슬 공항에 나가봐야겠다. 하필 이 추운 날 출장에서, 더운 곳에 가니 옷을 어떻게 입으라는 거냐고... 그 와중에 뭘 하라는 분이 나오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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