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초등학교 4학년인 딸아이의 김나지움 진학을 앞둔 시점입니다. 졸업반 부모님들 사이에서 본격 눈치 게임(?)이 시작됐습니다. 저희 동네에 김나지움 3곳이 모여 있는데, 분위기와 호불호가 각기 다른 학교들이기 때문입니다.
딸아이를 둔 가정에서는 '단짝친구 사수 작전'이 치열한데요.
김나지움에 진학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초등학교에서부터 함께 올라온 단짝 친구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조별과제와 토론, 조별발표 할 일이 정말 많은데 단짝, 내편이 없으면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라는 게 김나지움 딸아이를 둔 부모님들의 전반적인 설명입니다.
두 녀석들
제 딸아이도 벨기에+러시아 백그라운드를 가진 단짝 반친구가 있는데요. 그 둘이 자연스레 같은 학교로 진학하면 가장 이상적이나, 현재 제 딸아이와 저희 부부가 선호하는 A학교를 딸아이 단짝 친구 아버지 스벤이 싫어한다는 게 고민거리입니다.
"A학교는 너무 학업을 빡세게 시킨다고 들었어. 그럼 아비투어(고교 졸업 자격) 점수가 잘 안 나올 수 있어. 전략적으로 난 네 딸과 우리 딸이 C학교에서 베스트 퍼포먼스를 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고교 졸업 시험 점수가 낮게 나오면 나중에 원하는 대학 전공이 생겨도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한국이나 독일이나 대학 진학까지 염두에 두는 부모들 마음은 비슷한가 봅니다.
테크니컬하게 생각하면 스벤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원하는 대학 학과에 진학하지 못하더라도, 아니 대학을 안 가더라도 생계를 꾸려갈 직업 하나는 분명히 마련할 수 있는 독일의 환경이 한국과 다르다는 점을 저는 중요한 전제로 둡니다.
특히 저는 외국어 학습에 재능을 보이는 딸아이가 유럽 혹은 미국을 무대로 자유롭게 꿈을 펼치길 바랍니다. A학교는 그런 학습 인프라와 면학 분위기가 갖춰진 곳입니다.
딸아이는 학교 입시 설명회(Infoabend)에서 이 학교에 큰 마음을 샀습니다. 학교 건물도 덴마크의 유명 건축가가 왕가 헌정으로 만들어 어느 학교에서도 보지 못한 세련됨과 학생 동선을 고려한 극강의 효율성을 갖췄습니다. 가구와 디자인 소품을 좋아하는 아내의 영향을 받았는지 딸아이도 학교 건축물 자체를 퍽 마음에 들어했습니다.
오픈데이에 온 방문객 환영 행사
하지만 저희 가정에 가장 중요한 가치관은 '실패의 교훈과 책임감'입니다. 오늘 C학교 오픈데이에서 만난 딸 친구 아빠 스벤에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략적으로 네 말은 논리적이야. 그런데 나는 우리 아이가 그 학교에서 설령 실패를 맞보더라도 그저 과정일 뿐이기에 배울 게 많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덧붙여 "그 학교가 소문만큼 빡세진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런데 그렇게 힘들다면, 한 번 도전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인생을 살면서 우린 어릴 때든 나중이든 어려움을 맞닦뜨리게 되잖아. 김나지움 때 정말 최선을 다해 좋은 결실을 맺는다면 그건 우리 아이들이 인생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인생 자산이 될 거라고 믿어. 그게 우리의 가치관이야"
곰곰이 듣던 스벤은 "네 딸도 같은 생각이니?" 물었습니다.
"응. 아이들은 어리지만 상황과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면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수 있어.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내린 선택에 책임을 다하는 법도 우리 아이가 꼭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야"
딸이 A학교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는 이유로 가기 싫다면 기꺼이 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딸아이도 아내를 닮아서인지 근성이 있습니다. 아이도 아내와 저도 A학교를 여전히 선호합니다.
저희 딸아이가 없으면 아무 학교도 안 가겠다는 딸래미 때문에 스벤은 여전히 고민이 크다고 합니다. 과연 이 둘은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