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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진 Feb 01. 2024

집주인의 보증금 '낼름' 시도를 막은 결정적 한 방

'세입자를 지켜주는 변호인 천사'라는 키워드로 제작한 AI 이미지.



독일에서 이사 나갈 때 가장 짜증나는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집주인이 보증금을 안 돌려줄 때 입니다. 보통 3개월치 월세를 보증금으로 묶어놓는데요. 월세가 200만 원이다, 치면 보증금은 6백만 원입니다. 이게 한국의 전세처럼 억대를 넘어가는 게 아니다 보니 가끔 저희 같은 이민자들이나 해외 주재원으로 1~2년만 머물고 떠나는 세입자들의 보증금을 낼름(?) 하는 집주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집주인과 보증금 분쟁이 생기면 '에잇 그냥 떼이고 말지 뭐'하고 포기하는 세입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직전 집주인이 그랬습니다. 남편은 여행사를 운영하는 60대 터키인이고, 아내는 비슷한 연배의 독일인입니다. 딸은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지요. 저희가 살았던 집의 명의는 집주인의 딸 앞으로 돼 있습니다. 임대 물건을 실질적으로 관리하는 주체는 결국 그 부모였습니다.


이사를 마치고 2개월이 지나도록 이 분들이 보증금을 차일피일 미루며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몇 번이나 편지를 써서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우리가 새로 사준 오븐을 너희가 너무 더럽게 썼다", "냉동실 수리비가 나왔다", "하이쭝(라이데이터)에 녹이 슬었다", "전자레인지가 작동하지 않는다"며 이런 저런 트집만 잡았습니다.


사는 동안 화장실 배관 공사 등이 길어져 가뜩이나 불편하게 살았는데 자꾸 보증금은 돌려주지 않고, 협상력을 높이려는 듯 이런저런 트집을 잡는 집주인의 행태에 아내와 저는 몹시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더구나 집주인이 2024년부터는 월세를 올리겠다고 작년 10월에 통보를 했었고, 우리는 그에 동의할 수 없었는데요. 이에 계약된 기간보다 일찍 나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거이거 월세 인상하려고 했던 금액까지 모조리 보증금에서 떼고 주려는 수작 아니야?' 싶어서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함부르크의 세입자보호연대(Mieterverein)에 가입해 활동가 분들께 주저리주저리 털어놓았습니다. 저희 대신 세입자보호연대에서 편지를 써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집주인 내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저희가 집을 더럽게 썼다면서 자꾸 보증금 반환에 대해 확답을 피했습니다.


임대차보호법을 찾아가며 집주인과 편지 공방을 벌이는 일은 정말이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직전 집. 저희 정말 깨끗하게 사용하지 않았나요? 출처: 직접 촬영


집주인을 한 방에 KO시켜준 구원자


이때, 독일에 '변호사 보험'이 있다는 걸 상기합니다. 수소문 끝에 변호사 보험을 추천받아 가입했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바로 변호사 보험에 전화를 걸어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담당자는 제 상황을 접수한 뒤 변호사와의 전화 상담 날짜를 잡아줬습니다. 변호사는 대략적인 상황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제 얘기를 한 번 더 청취했고, 법적 쟁점 사안을 하나하나 체크했습니다. "이 경우,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으려 꼼수를 부리는 것 같군요. 집주인에 편지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전화 통화로 청취한 제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해주신 변호사 님. 출처: 직접 촬영



그 뒤로는 변호사 보험에서 운영하는 상담 포털에 제 소명 자료를 PDF로 만들어 올리고 피드백을 주면 됩니다. 이때부터 모든 건 변호사와의 채팅으로 상담이 전환됩니다. 변호사가 집주인에게 편지를, 집주인 측이 변호사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그러면 저희 변호사는 그걸 스캔해 우리 채팅창에 올려줍니다. 제가 더 반박할 거리를 제공하거나, 추가 증거를 제공하면 그걸 바탕으로 우리 변호사는 다시 집주인에게 재반박 편지를 보냅니다.




이런 식으로 소명자료를 채팅창에 올립니다. 출처: 직접 촬영



변호사의 편지를 보며 "아, 역시 변호사는 다르구나" 싶었습니다. 법리적으로 따졌을 때 세입자가 오븐 등 기기에 남긴 생활흔은 보증금에서 공제해야 할 대상이 전혀 아니었던 겁니다. 저희 변호사의 변론 요지는 이렇습니다.


"그래 100번 양보해 정병진 씨가 오븐을 더럽게 썼다고 치자. 그래서, kaputt(고장) 됐니? 아니잖아. 잘 작동하잖아. 냉동실도 전 세입자가 증언 가능하고, 하이쭝 녹이 슨 건 정병진 씨가 입주 당시 찍어놓은 영상에 고스란히 찍혀 있어. 지금 당신의 행태는 보증금을 안 주려고 하는 것으로 의심받을 여지가 커. 우리 에스크로 계좌번호 알려줄테니 몇 월 며칠까지 입금해. 안 그러면 법정으로 가는 거야"


사이다 2백만 캔을 들이켠 것 같은 청량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독일 법조문을 일일이 들춰보지 않고도 집주인의 궤변에 깔끔하게 반박할 수 있다니, 너무 신선하고 감사했습니다. 이윽고 집주인을 꼬리를 내렸고 보증금을 고스란히 돌려주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마음을 담아 변론 상담 채팅의 마무리 인사를 건넨 지난해 대화. 출처: 직접 촬영



독일 시민 60%는 자가가 아닌 월세로 삽니다. 스태티스타 자료를 보면 연방별 가구의 40%(자를란트)에서 최대 84%(베를린)가 세입자로 살아갑니다.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마련된 이유입니다. 물론 집주인을 보호하는 정책도 잘 갖춰져 있습니다. 집주인의 정당한 요구에 따른 보증금 일부 공제는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집주인과 세입자 중 약자는 세입자 쪽이긴 하죠. 법적 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은 배경입니다.


이럴 때 변호사 보험이 있으면 소송으로 가기 전에 조기에 사태를 진화할 수 있는 좋은 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대기업이나 커다란 송사가 있을 때라야 선임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요. 세상이 그렇게 우리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잖아요? 자잘한 이슈를 변호사 보험으로 바로바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일이 더 크게 번지고, 내가 어쭙잖게 손을 댔다가 사태가 꼬여버린 상태에서 변호사를 선임하는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저는 한 달에 40유로(우리돈 5만 7천 원 정도) 정도 내는 데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이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음을 체감했습니다.


한국의 변호사 지인 분들께 독일의 변호사 보험 이야기를 했더니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라고 입을 모으더군요. 중병이든 송사든 초기 대응이 중요합니다. 변호사 서비스를 한국에서 서민들이 합리적인 금액대의 보험료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필부필부들이 세상 살아갈 때에 든든한 법적 버팀목을 마련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국에도 이런 보험 상품을 개발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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