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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병진 Jan 30. 2024

"언론이 죽였다" 이런 말 안 나오는 독일, 시사점은?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에 실린 이선균 배우 부고.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선균 숨진 채 발견"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직접 촬영.



고 이선균 씨는 영화 ‘기생충’으로 유럽에 얼굴을 알렸습니다. ARD, DW 등 독일 주요 언론은 ‘영화 기생충의 배우 이선균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제목으로 그의 최근 부고를 알렸습니다.


물론, 독일에서는 한국의 연예인에 관한 소식이 그리 큰 뉴스 밸류를 갖지 않기 때문에 국내 연합뉴스를 인용한 보도로 짧게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주요국 언론들도 그의 죽음을 문화*예술 섹션에서 비슷한 수준으로 다루면서 그의 죽음을 덤덤히 알렸습니다. 영국 BBC는 “이 씨의 마약 혐의 조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뜨거웠고, 그 과정에서 이 씨의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저는 고 이선균 씨에 관한 독일의 보도와 누리꾼들의 반응을 보면서 한국의 여론 지형을 포개어 생각해 봤습니다. 스캔들에 휩싸인 유명인과 언론, 그리고 누리꾼 간의 역학관계는 한국과 독일이 명징하게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독일에서는 '언론이 유명인을 죽음으로 몰았다', '누리꾼이 유명인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 구조입니다.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론이 한 데 모인 포털이 없다


독일이나 유럽에서는 누리꾼의 반응을 수시로 확인할 수 있는 대형 포털 같은 곳이 없습니다. 실시간 기사 랭킹이 표시되거나 검색어 순위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식의 포털이 부재합니다. 한국의 '네이버', '다음' 같은 시장을 독식하는 채널이 없습니다. 물론 여기도 포털 사이트 자체는 있습니다. 주로 이메일 도메인을 만드는 용도입니다. 검색은 대부분 구글링으로 충당합니다.



한국과 독 소셜미디어별 활성사용자 수. 출처: 스태티스타



소셜미디어 중에선 어떤 채널이 가장 발달해 있을까요. 스태티스타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활성 사용자 수가 가장 많은 채널은 카카오톡입니다. 지난해 기준 4천4백2십만 명입니다. 전국민이 다 쓰고 있는 거죠. 독일은 페이스북입니다. 2023년 기준 활성사용자 수가 4천7백만 명입니다.



전세계 소셜미디어별 월간 활성사용자 수. 출처: 스태티스타



특히 메신저로는 왓츠앱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데요. 독일 사람들 뿐만 아니라 남미와 유럽 등지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메신저입니다. 우리가 카톡으로 메시지를 보내듯, 독일에서는 왓츠앱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습니다.


독일에서 기사에 달린 댓글이나 X(구 트위터) 포스팅으로 사람들의 단편적인 반응이야 얼마든지 접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여론을 살펴보려면 사실상 설문조사를 별도로 진행해야만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언론은 유명인의 은밀한 사생활엔 관심 없다


유명인의 스캔들이 비중있게 다뤄지는 건 독일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입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내용 중심으로만 다룰 뿐 내연녀와의 치정 뒷이야기, 주고받은 메신저 내용 공개, 남녀 간의 사적인 내용이 담긴 녹취 폭로 등의 보도는 없습니다.


대표적인 유력 정치인 케이스로는 아날레나 베어복 현 독일 외무부 장관, 연예인 중에선 헤비메탈 그룹사운드 람슈타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녀의 책 "Jetzt". '지금'이라는 뜻이다. 출처: alliance/dpa



베어복 장관은 3년 전 총선에서 녹색당의 총리 후보였습니다. 총선 과정에서 책 표절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당시 베어복 후보는 인용 처리 부분이 다소 불충분했다며 인정할 건 인정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반박했는데요. 기성 메인 뉴스에서 집중 보도된 건 물론입니다. 독일 제2공영방송 ZDF에는 Heute-show라는 인기 시사풍자쇼가 있는데, 여기서 베어복 장관은 정말 신랄하게 조롱 받았습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추가로 선정적인 내용의 녹취가 나오는 일은 없습니다. 언론의 팩트 체크가 완료된 보도 이외의 다른 소스가 인터넷상에 퍼지는 일은 잘 없습니다.



람슈타인의 보걸 틸 린데만. 독일에선 BTS급으로 인기가 높다.. 출처: Rolling Stone



람슈타인의 경우 메인보컬 틸 린데만을 둘러싼 미투가 불거졌습니다. 지난해 5월 북아일랜드의 여성이 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독일 수사당국의 수사가 진행 중인데요. 당시 리투아니아에서 콘서트를 마친 틸 린데만이 이 여성을 에프터파티에 데려와 약물을 투여하고 범죄를 저질렀다는 게 주요 혐의입니다. 


이 경우에도 틸 린데의 반박, 다른 여성들의 증언,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에 대한 공식 입장 발표가 전부입니다. 람슈타인의 공연을 취소하라고 촉구하는 여성단체의 시위 등이 다뤄지긴 하는데요. 독일 내에서는 거의 BTS 급으로 유명한 밴드이지만 사람들이 람슈타인에 대해 이 자리 저 자리에서 거론하진 않습니다. 남의 말을 대놓고 하지 않거나,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지 않으려는 기본적은 유럽 사람들의 속성이 있고요. 그걸 굳이 어느 매체에 올려서 주목을 받으려 하거나 공론화하려는 시도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명예훼손 등으로 법적 처벌을 받게 되면 그 죄가 무겁기도 하고요. 


저널리즘 이론에 비춰봤을 때 언론의 보도를 3가지 층위로 나누면 개인 단위, 조직 단위, 그리고 국가와 이데올로기 단위로 구분합니다. 독일 주류 매체의 뉴스는 대체로 조직 단위와 국가와 이데올로기 단위로 구성됩니다. 개인 단위의 은밀한 사생활은 뉴스 밸류가 되레 떨어집니다. KBS의 메인뉴스에서 '이선균 카톡 내용'을 공개하는 보도를 했었는데, 독일의 KBS 격인 ARD에서 메인뉴스 '타게샤우'의 주요 꼭지로 유명인의 메신저 내용을 다룬다면 수신료 납부자들은 물론 국회의원과 여러 기관들의 뭇매를 맞게 될 겁니다.


물론 타블로이드지 'Bild' 같은 매체는 예외입니다.


독일 방송국은 돈 걱정 안 한다


그렇다고 독일 언론이 독야청청 올곧고 바르기 때문에 그런 보도를 안 하는 걸까요? 돈에 쪼들리지 않아도 되는 구조를 빼놓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저는 분기별로 한 번씩 독일 방송공사에 수신료를 냅니다. 56유로 정도 내는데, 한화로 8만 원 수준입니다. KBS가 분기별로 8만 원씩 준조세처럼 거둬들인다면 한국에선 엄청난 역풍을 맞을 겁니다. 이렇게 모이는 돈이 연간 85억6천7백만 유로, 우리돈 12조 4천 2백 7십 6억 원에 달합니다.



독일 수신료 수익. 출처: 스태티스타



독일 방송국은 그렇게 조성한 수신료로 운영합니다. 독일은 연방별로 거점 방송국이 존재합니다. 베를린 쪽에는 ARD, 제1공영방송이고요. 방송국이 많이 몰려 있는 퀼른에 ZDF 제2공영방송, 그리고 함부르크 등 북독일에 NDR, 남부 바이에른주에는 BR과 같이 연방을 총괄하는 지역 거점 방송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구성합니다. 우리로 치면 KBS 같은 공영 방송이 각 도별로 존재하고, SBS처럼 서로 콘텐츠를 제휴하면서 동시에 수신료로 거둬들인 재원까지 나누는 형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시청률을 위해 자극적인 뉴스를 구태여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덕(?)분에 독일 방송이 대체로 촌스럽고 투박한 건 국민이 감수해야 할 몫이겠습니다만 그래도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선정적인 뉴스를 주요뉴스에서 보지 않아도 되니 수신료 자체가 아깝다고 느껴지진 않습니다. 참고로 신문이나 인터넷 기반 미디어는 별론입니다.


이처럼 독일과 한국의 매체 환경은 대체로 비슷하고 세세히 다릅니다. 여론이 한 데 모이지 않는 디지털 플랫폼들의 구조, 타인에 삶에 가타부타 대놓고 말하지 않는 문화적 분위기와 이를 감안한 언론의 어젠다 세팅, 그리고 이를 가능케 만드는 재원 파이프라인 등이 '언론이, 누리꾼이 유명인을 죽음으로 몰았다' 류의 표현 자체가 나오지 않도록 하는 전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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