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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ymilk Mar 18. 2022

스물 여섯, 서른 여섯

십 년 전 내가 꿈꿨던 서른 여섯은 아니지만, 뭐 어때.

뜬금없이 새해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3월 댓바람부터 20대 시절을 떠올리게 된 건

어쩌면 10년 전 살던 동네로 다시 이사를 와서일지도 모르겠다.


서른의 중반대를 한창 지나쳐 가고 있는 요즘, 20대 때와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신기하기도 서글프기도 하다.

가장 신기한 건 20대가 10년 전이라는 것인데, 서글픈 건 역시나 무겁고 여기저기 아픈 몸이다.

안도되는 부분도 있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었니? 별것도 아닌 걸. 그때 나에게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써보기로 했다. 나의 스물 여섯과, 나의 서른 여섯을. 이 글을 아마 마흔 여섯이 되어서 꺼내보는 내 흐뭇한 표정을 상상하며.



#스물, 여섯


2012년, 나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어설프게 첫 직장에 취직을 해서

내 자리와 내가 갈 길에 대해 괴롭게 고민하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웠지만 불안했고, 자신감이 넘쳤지만 인정을 갈구했다. 회사에선 의젓하지만 똑똑하면서 센스 있는 막내 역할을 적당히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렸고, 친구에 목맸지만 그들 사이에선 뒤처지지 않게, 나만의 매력을 발산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아침마다 직장으로 날 데려다주는 파란 버스 시간에 맞춰 아파트 주차장을 가로질러 허겁지겁 뛸 때면, '30대가 되면 내 차 몰고 다니면서 이렇게 맨날 뛰면서 출근 안 해도 되겠지?' 싶었더랬다.


월급은 150만원 정도 받았고, 절반은 저축을 했다. 남자친구와는 종종 싸웠고, 치마보다는 청바지를 즐겨 입었다. 한 취미와 직장을 꾸준히 파기보단,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마치 이 사회에서 내 자리를 찾아가고 싶은데 그게 어디인지 잘 모르겠어서 하염없이 긴 터널을 지나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니, 꿈꿨다. 30대가 되면,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확실히 알고 좀 잘하고 있겠지? 지금의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모든 것들이, 조금은 모여서 덩어리가 되어 있겠지? 예금통장엔 저축도 좀 되어있고, 나는 좀 더 멋있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30대가 되면...



(10 years later)

#서른, 여섯


그런데 나는 지금도 가끔 그 같은 버스를 놓칠세라 아침에 뛴다.

차는 갖게 되었지만, 협소한 회사 주차장과 아침 교통체증 탓에 갖고 다닐 생각도 없다.


지금 일하는 직장에서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는 나를 상상하기도 한다. 

나만이 잘할 수 있는 전문역량은 여전히 쌓지 못했다. (쌓아가는 중인가?)


결혼은 했구나. 그런데 뭐, 일종의 남자친구인 그와도 종종 싸운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그랬어서 너무 싫었던, 주말부부를 하고 있다.


20대를 대부분 같이 보냈던 가장 친한 친구와 절교했다. 


예금이 적당히 쌓인 통장이 있다. 단, 대출통장도 하나 있다. 20대와 비교하자면, 그땐 직장을 그만둘 수 있었는데 지금은 못 그만둔다. 이건 마치 정글에서 포효하는 사자가 아니라 동물원 우리 속 게으른 사자가 되어버렸다.


그때는 인생의 의미라도 갈구하며 긴긴밤 온갖 생각에 사로잡혀 음악을 듣고 글을 썼지, 지금은 삶에 대한 고뇌도 하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산다.


결론은, 적당히 이루었지만 꽤나 다르다. 그리고 뭔가 아쉽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의 아쉬움 보다는, 그때 내가 생각하고 설계한 인생과는 사뭇 다르다.


젠장, 30대가 되면 멋진 바에서 혼자 마티니라도 한잔 하며 불금을 보낼 줄 알았는데.


늦은 저녁까지 길어진 줌 미팅을 힘겹게 벗어나 내가 오늘 같은 불금을 보내는 방법은 

고작 로제 떡볶이에 야채튀김과 핫도그를 추가해 

뜨겁고, 맵고, 자극적이고 영양가는 별로 없는 음식으로 

20대 때보다 한층 피곤해진 내 위를 혹사시키는 일뿐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내가 생각하고 꿈꿨던 서른 여섯이 이런 거였나?


그때의 나를 만나는 상상을 가끔 한다. 

너, 10년 후에 어떻게 살고 있는 줄 알아? (히익, 악몽이다!)


근데 한편으론 30대가 되니 여유가 늘었다. 짬바라고 할까. 


더 이상 웬만한 일에는 호들갑 떨지 않는다. 이상한 사람을 만나도 그러려니 한다. 고치려고 하지 않고 피한다. 예전에는, 뭐 그렇게 잘났는지 지적이 끊이질 않았고 화가 많았었다. 무례한 어른들, 거짓말하는 정치인들, 불의의 사고들... 많은 것이 나를 화나게 했고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도 높았다. 그래서 피곤했다. 


서른여섯이 된 지금 돌아보니, 조금은 우습다 그땐 뭐가 그렇게 심각하고 어려웠을까.

그렇게 눈부시고 가능성이 무한한 날들이 없었는데.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버스 러닝 출근길은 피로회복제 박*스의 CF 속 한 장면 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돌아보면 20대는 불안하고, 두렵다. 이상향은 뭉게뭉게 하늘 끝에 가 있지만, 현실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안정적인 직장에서의 단단한 입지도, 나를 인정해줄 만한 커리어나 대체 불가능한 능력도, 나만의 매력조차 잘 발견하지 못한다. 


30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더 많은 것을 이뤘다기보다는,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작은 실패와 성공들을 하며 의연해졌다. 인생이 절대로 흘러가게 둘 수 없었는데, 흘러가기도 하나보다 싶다. 나에 대한 쿨한 인정도 한다. 이 정도면 그래도 꽤 괜찮은 삶이다 싶다.


여전히 치마보다는 바지를 입고, 수많은 취미를 남편과 함께 즐기며 나아갈 길을 갈팡질팡 헤매지만 

로제 떡볶이 잔뜩 입 주위에 묻힌 채로 그때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불안한 게 뭐 어때서? 인생 길어. 그리고, 세상이 드럽고 까칠하니까 그만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귀하고 소중한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얼마 전 40대 넘는 회사 선배들과 얘기하다, 40대에는 뛰어난 뭐라도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 남들 사는 것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한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지금을 좀 더 즐기며 살아봐야겠다.

미래를 너무 불안해했던 20대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건 그거니까.


2012년에 한창 유행이었던 동물농장 게임. 그리고 2014년에 나는 뉴욕 센트럴파크를 갔다.
첫 직장 동아일보/채널A. '월든'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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