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태료 처분을 기다리며... 낙오, 대열에서 벗어남 20200706
제도가 바뀔 때면 늘 혼란스럽다. 하루종일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뉴스만 들여다보며 살면서도 정작 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일들을 제때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해 허둥거린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번 과태료도 그래서 받게 되었다. 재산 관련 중요한 제도 변화에 대해 찾아보니 그동안 온갖 블로그와 신문에서 떠들어댔는데 정작 나는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건강과 아버지의 퇴원, 주말마다 다니는 대학원 성적 마감, 밀린 회사일 등 모든 일이 6월말을 마감으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러는 사이 정작 내 개인 신상에서 일어나게 된 주요 변화를 놓친 것이다. 나흘이나 지나서 구청 민원실에 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NO". 나라도 들어줄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아내는, "정말 현실적이지 못해"라고 핀잔을 늘어놓는다.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아직도 "나는 OO를 해보고 싶어." "어제부터 OO를 시작했어" 라는 식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나에게 아내가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참 현실 감각 떨어지는 남편...
그래서 아직 서울 시내 한가운데서 마냥 오르는 집값만 바라보며 낭패감에 휩싸여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받아들인다.
이제부터 좀더 현실적으로 살아보기로 다짐한다. 지하철 출근길에 앉아서 인문 서적이나 역사 서적을 읽는 대신 재테크와 자기 계발서를 읽고, 투자 소모임에 나가고 주말이면 집과 땅을 보러 다니고.. 이런 것들인가. 만약 그런 것들이라면 나는 할 수 없다. 내 성정에 맞지도 않고, 그런 책들은 읽어봐야 하나도 머리에 입력되는 것들도 없다. 적어도 이런 분야에 관한한 나는 난독증이며 문맹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출근길에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독서가들을 가끔씩 무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반성한다. 그런 허접한 자기 계발서를 읽고 있는 것을 무시한 내 태도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뭐를 읽든 그 삶에 대한 자세를 무시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모두가 저마다 참으로 열심히,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한 순간에 낙오자가 되어보니, 낙오자가 되는 것은 내가 잘 못해서도 아니고 무지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삶에 대한 자세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뼈아프게 후회한다. 열심히 살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허둥대고 초조해하기만 할 뿐 요령있게 침착하게 삶을 과연 받아들였던 적이 있던가.
이제 흥분하지 않기로 한다. 호들갑 떨지 않고 초조해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묵묵히 할 일을 해나가는 것 나이 오십을 앞두고 이제사 깨닫는 일이다.
어른들은 모두 일을 하러 갔다는 어느 시인인가가 썼던 싯구절이 지금 떠오른다. 그리고 가슴에 와닿는다. 그냥 묵묵히 자기 어깨 위에 놓인 짐을 지고 걸어가는 것, 그것을 남에게 벗어줄 수도 없고, 남이 진 짐의 무게와 자기가 지고 있는 짐의 무게를 비교할 필요도 없다.
내 짐을 지고 내 길을 가는 것, 간혹 남의 짐을 나누어 지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존경과 격려의 말을 보내면 된다. 지쳐 쓰러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수도 있으리라.
내가 처음으로 낙오자가 되어 본 뒤에야 얻은 깨달음이다. 비싼 수업료를 내는 과태료 처분을 받은 것 갖고서 '낙오'라고 하는 표현을 쓴 것을 나무라지는 마시라. 젊을 때 경험하는 낙오와 나이 들어 경험하는 낙오는 차이가 크다. 기왕 낙오를 한다면 차라리 젊을 때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낙오자, 잠시 대열에서 벗어난 처wl가 되어보고서야 ... 드는 깨달음, 다들 참 열심히 살아가고 있구나. 철새들도 무리를 못 따라오는 동료들을 잠시 기다려주면서 함께 쉬었다 가기도 한다는데(아래 그림),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기다려줬던 적이 있던가...
문득 내가 낙오된 느낌에 휩싸이면서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낀다. 좀더 세상에 대해 정중해지고, 반듯해지고, 겸허해져야 겠다. 자연의 섭리는 약육강식만은 아닌 것 같다. 철새들의 이 움직임은 그래서 무척이나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