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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Mar 10. 2020

삼십 대, 그 미묘함에 대하여 #29 - 수영장 우정

나를 자기라고 부르는 사람들

감히 자부하건대 나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보는 감을 지녔다. 고독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능인지 사회적으로 학습된 탓인지 어렸을 적부터 특정 인물들을 선택하고 무리를 지어 소속됨으로써 소외되지 않을 특전과 함께 안정감을 얻곤 했던 것이 결국 하나의 능력으로 발전된 것이다.

      

선택과 비선택을 가르는 그 감, 그 삘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차곡차곡 쌓인 경험치가 증명하건대 그것은 당연하게도 성격, 취향에 따라 형성되었을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 그리고 한편으론 가정형편, 외모와 같은 다소 놀랍고 독특한 기준에 의해 결정되곤 한다. 그 과정을 거쳐 꾸려진 무리의 구성원은 누구 하나 너무 많이 튀지 않게 비슷하고, 또 살짝 씩은 다르면서 결국 서로 간의 단단한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비슷함 속 다름’, 혹은 ‘다름 속 비슷함’ 안에서의 조화라고나 할까. 조금 생뚱맞을 수 있지만 쉽게 예시를 들어보자면 마치 잡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당면과 시금치, 목이버섯, 양파, 그리고 당근을 보라. 한 무리를 구성하기에 기가 막히게 알맞은 조합이지 않은가. 이제 그들은 각각의 위치에서 어색함 없이 앙상블을 이루며 진한 동지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금수저, 모범생, 지나친 내향인, 그리고 나이 든 자와는 우정을 쌓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그들과 내가 궁합이 맞을 리 없다. 내가 당면이라면 그들은 미슐랭 별을 딴 레스토랑의 값비싼 프랑스 요리 재료이거나, 혹은 새싹보리이거나, 천엽이거나, 그도 아님 호두이기 때문에. 구성이 바뀌곤 했을지 몰라도 내게는 언제나 시금치, 목이버섯, 양파, 그리고 당근이 함께했고 그것이 언제나 당연했으므로.

      

그러나 안타깝게도 잡채의 우정이 늘 굳건한 것만은 아니다. Y에 이어 W까지 유부의 세계로 접어들 준비를 하게 되면서, 굳건하던 우정은 확실히 예전만큼의 위력을 갖기 어려워지고야 만다. 언제부턴가 서로가 발을 딛고 있는 세계 사이에 자연스레 틈이 생기고, 언제부턴가 만남과 연락의 빈도와 대화 주제 역시 자연스레 다르게 흘러가며, 영원히 견고할 것 같던 우정이 실은 가변적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삶의 이치를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때가 바로 이때이다.

        

그러한 이유로 최근 내가 가장 자주 만나고 어울리는 무리가 ‘언니들’, 게다가 무려 평균 연령 마흔셋의 수영장 언니들이 되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결코 함께 어울리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들이 나와 한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은, 말하자면 나의 소속이, 아니 오랜 기간 정체되어있던 나의 세계가 비로소 변화할 시기가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당연히 처음부터 그녀들과 어울리기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서른몇 해를 살며 세상의 온갖 선입견에 젖은 상태라 ‘나이 든 여자’에 대한 내 안의 무의식적인 믿음, 불편한 편견이 그들과의 거리감을 유지하는데 한몫했던 것이다. 그 믿음이란 이를테면 자기들의 오랜 견고한 무리를 과시하며 신참에게 텃세를 부리고, 젊은 여자를 질투하고, 무례하게 굴며, 간혹 공포감을 조성한다는 진부한 소문에서 비롯된 무시무시한 이미지들이었다.

   

내가 특정 집단에 대한 심각한 차별주의자일 거라는 끔찍한 생각도, 결코 혐오의 언어를 사용하고 싶지도 않지만, 내가 겪은 사실만을 토대로 얘기하자면 놀랍게도 소문은 얼마간 진실로 드러나는 듯했다.

      

단언컨대 수영장은 나이 든 여성의 권력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젊음을 숭상하는 사회에서 대체 세상 어떤 곳에서 젊음이 힘을 못 쓸까 의문인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들에게 강력히, 아주 강력히 수영장을 추천할 테다(특히 샤워장). 여성의 향이 물씬 풍기는 공간. 그곳의 실세는 단연 중년의 여성들이므로.

      

첫날, 탈의실에 들어서자마자 몇 개의 눈이 나를 곧장 스캔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옷을 벗으며 재빠르게 눈알을 굴려 탈의실을 둘러보았는데, 역시라고 해야 할지 놀랍다고 해야 할지 대부분이 사십 대 이상의 중년 여성들이었다. 남들보다 예민하게 발달된 촉, 위험을 알리는 신호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제기랄, 큰일이다. 이 곳에 나와 맞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처음 접하는 낯선 세계의 검은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 검은 기운의 첫 번째 실체는 역시 텃세였다.

     

나는 그들에게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 곳에서 물과 기름이라는 표현은 약하다. 이건 마치 영화 ‘동감’에서의 유지태와 김하늘처럼 그들과 내가 같은 공간,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듯한 신비한 경험이었달까. 그들끼리는 매우 친밀하게 대화를 나눌지언정 마치 나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들은 내게 단 한 차례도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가벼운 눈인사조차 절대 허락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확고한 의지가 느껴져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나 역시 그들을 못 본 체 굴어야 했다.

      

종종 강습 전 시간이 남아 온탕에서 뜨끈하게 몸을 불리고 싶어도 이미 형성된 그녀들 무리와 나 사이에 결계가 쳐진 냥 쉽게 다가갈 수 없었는데, 우연인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용기를 내 그곳에 입장을 하면 그들이 입을 꾹 다무는 것을 두어 번 목격한 후로 나는 아무도 없는 시간의 사우나를 찾아 홀로 땀을 빼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다.

      

주말 자유수영에서 그들의 텃세는 더욱 진가를 드러냈다. 몇 바퀴인가를 돌다가 잠시 벽에 기대 쉬는 내게 별안간 ‘수영에 방해되게 거기 기대 쉬지 말라’며 내 몸을 거세게 옆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닌가. 아줌마, 좋게 말로 하시지 왜 미세요, 라는 내 울분은 차례차례 멀어져 가는 그녀들의 엉덩이와 단호한 발차기를 보며 고작 마음속으로만 처절하게 외쳐질 뿐이었다.

     

다음으로 무례함. 그들은 마치 무분별한 성희롱적 언사가 용납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처럼 몸매 품평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젊은 여자’를 향한. ‘리즈시절의 종료’과 ‘나이 듦’이 화두인 나조차도 그곳에서는 평균 연령을 뭉텅 깎을 수 있는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도마에 오르긴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던 셈이다.

     

몇 번 정도 신규 회원이 들어올 때마다 그녀들에 대한 몸매 품평을 하는 것을 슬쩍 훔쳐들으며 ‘내 몸’도 뒷담화에 좋은 안줏거리가 되겠구나,라고 합리적 의심을 품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훅 치고 들어올 거라곤 꿈에도 몰랐다.      


보통의 텃세 그녀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내게 친근하게 다가온 한 중년의 여성이 초면에 건넨 말이 ‘아유, 가슴이 이쁘네. 원래부터 그렇게 봉긋했어?’와 같은 말이었다는 예가 그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살짝 거슬리는 내용은 뒤로 하더라도 내게 말을 걸어준 것이 눈물 나게 고마워 은은한 미소를 띤 채 무어라 대답할까 고민하던 중 연달아 꽂힌 말이 놀랍게도 ‘꼭지도 원래 컸고?’라는 기함할 만한 말이었다면. 믿기 힘들겠지만 말이다.

       

실세로서의 공포감 조성은 말할 것도 없다.      


뭐, 변명에 불과하다고 하겠지만 찬물에 새파래질 입술이 신경 쓰였던 탓에 샤워 후 색이 들어간 립밤을 ‘살짝’, 정말 ‘아주 살짝’ 바른 것이 문제였다.      


“씻고 들어가!”     


대체 언제부터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쩌렁쩌렁 샤워실을 울리는 벼락같은 한 마디에 나는 하마터면 뒤로 벌러덩 주저앉을 뻔했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화장이야? 화장은?”     


이어지는 매서운 말이 쐐기를 박았다. 뒤통수를 가격한듯한 얼얼한 충격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수치심이 확 끼쳐왔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라는 말이 벌떼처럼 윙윙 머릿속을 날아다니고 손가락이 파르르 떨려왔다. 모두가 다 나를 주시하는 건지 시선이 따가웠다. 아무리 우리 반 강사가 젊고 잘생긴 남자 강사이기는 해도 립밤 한 번 바른 게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쪽을 당해야 할 만큼 중죄란 말인가. 이것이 정녕 이 세계의 정의구현이란 말인가. 이것도 하나의 험담 거리가 되겠지, 그들의 입에 하나의 에피소드로 오르내릴 생각을 하니 억울하고 분한 감정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순하기는커녕 ‘한 예민’, ‘한 성깔’하는 나 역시 그들의 품평과 무례한 언행의 컬래버레이션을 적당히 넘기기 수월했을 리 없다. 나는 안면근육을 최대한 이용해 표정으로 불쾌함을 표출한다든지, 그들의 말이 안 들리는 척 무시하는 방식으로 그들과 내 사이의 벽을 더욱 단단히 쌓곤 했다.      


어쨌거나 이 같은 경험을 통해 나는 소문을 진실로 증명해냈을 뿐만 아니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들에게서 배제되고 소외되어 마침내 그 세계의 이방인이 되었다.      


전혀 맞는 구석이 없는 이들에게 어떤 우정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과 내가 궁합이 맞을 리 없다. 내가 당면이라면 그들은 주름지고 딱딱한 호두이므로. 소속의 욕망을 기어코 거세시키는 호두 따위, 거부하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물론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이 종종 외롭고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미안하게도 그것은 내게 마냥 불쾌하다거나 우울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소외된 생활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은근한 우월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자기들끼리 모여 텃세나 부리는 유치한 ‘아줌마’ 문화를 만들어가는 그들과 달리 나는 아직 질투받을 수 있는 젊은 여성이라는 존재감, 나는 당신들과 절대적으로 다르다는 근자감이 나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소속의 욕구가 매우 강렬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욕구라 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준거집단’이라는 전제가 붙어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들의 무리에 결코 소속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그들은 내게 있어 추하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가속화시키기까지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한 신념이 무너지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듯 그토록 확고했던 생각의 변화는 아주, 아주 작고 평범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몇 달쯤 지났을까. 꽤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앞 지퍼가 있는 수영복을 가져온 것이 화근이었다. 부드럽게 올라가지 않는 지퍼를 힘으로 올리려다 그만 지퍼가 홀랑 빠지고야 말았다. 불행히도 누구한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끼워지지 않는 지퍼를 들고 홀로 이런저런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러나 역시 무리였다.      


도와줄 친구 하나 없는 이방인의 비참함을 느끼며 슬슬 수영복과 강습을 포기하고 씻고 간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고 결론을 내렸던 그때였다.      


자기야, 내 수영복 빌려줘?”     


에, 자기라고?      


사소한 일상 속에서 기적을 마주하는 순간을, 나는 이제껏 몇 번이나 경험해왔던가. 호칭은 관계를 규정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를 가볍게 부르는 ‘자기’라는 호칭에는 그러나 은근한 친밀감과 호감, 그리고 연대의 가능성이 담겨있었다. 놀랍게도 그 낯간지럽고도 가벼운 호칭 하나에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던 믿음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치 빛들이 물러간 후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아스라해지는 그 시간에, 한 낮엔 미처 보지 못했던 생경한 풍경들이 눈에 담기듯이, 그토록 굳건했던 믿음이 희미해지자 이제껏 보이지 않던 장면들이 서서히 시야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영복의 꼬인 끈을 말없이 다가와 풀어주던 장면, 사물함 키를 잃어버려 우왕좌왕 당황하고 있던 내게 슬며시 키를 가져다주던 장면, 수경에 습기가 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의 다 쓴 안티 포그액을 마지막까지 쥐어짜 내던 내게 저 멀리서 샴푸를 발라보라며 큰 소리로 일러주던 장면까지. 사실 전혀 새로운 풍경이라고 할 수 없는, 언제나 거기에 존재해오던 풍경들. 늘 봐왔지만 보지 못했던 그들의 넉넉한 마음과 작은 연대의 풍경이 이제야 선연히,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득 깨달았다. 어쩌면 그들이 내게 나이 듦의 두려움을 가속화시킨 것보다 내가 지니고 있던 나이 듦의 두려움이 편견을 씌워 그 이면의 모습을 외면하게끔 만든 게 아니었을까. 유치하고 시시한 문화 속에 갇혀있던 것은 그들이 아닌 나였던 게 아닐까, 하고.

      

그러니까,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스포이트로 물을 쏙 빨아들이듯, 그들의 세상에 훅 빨려 들어가게 된 것은.

          



마흔이 훌쩍 넘는 그녀들을 언니라고 부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19금을 넘어선 49금 이야기를 깔깔대며 나누고, 나와 같은 수영복을 입고 온 한 젊고 예쁜 여자의 상도덕을 논하며 내 편을 들어주고 흥분하는 각별한 관계가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시금치와 당근, 목이버섯과 같이 한눈에 어울려 보인다거나 내 감이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어도, 결코 어울리지 않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조합이었어도, 그들과 한 소속을 이뤄 우정을 쌓을 수 있을 줄은, 그들에게서 또 다른 안정감을 얻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무관심의 세계, ‘다름 속 다름’ 안에서도 끈끈한 관계가 태어나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들을 통해 깨닫는다.      


그들을 통해 깨닫는 것이 비단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우정의 가능함뿐일까. 어차피 언젠간 들어서야 했을 나이 듦의 세계, 그 세계를 슬슬 긍정하기 시작한 것도 현재 내게 닥친 놀라운 변화 중 하나이다. 중심부에서 벗어나 있어도 편안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세계, 젊음을 아등바등 붙잡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이들을 통해 본다.     


나의 사십 대 언니들에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지만 물론 그럼에도 나는 종종 슬퍼지곤 한다. 우리 옆에 상큼한 이십 대들이 무리 지어 있는 걸 볼 때, 이제 그들보단 언니들에 더 가까운 내 위치를 인식할 때. 우습지만 질투와 험담의 대상에서 탈락되었다는 서운함, 중년의 여성들과 함께 있어도 왠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서 오는 위기감, 젊음의 세계를 슬슬 지나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우울함은 모자라고 지혜롭지 못한 나를 여전히 옥죄고 압박해오곤 하니까.        


그러나 그토록 두려워 마지않았던 그 세계의 오지랖이, 고나리질이, 지나친 챙김이, 언니와 자기라는 호칭이 이제 딱히 거슬리지만은 않은 까닭은 나도 비로소 그 세계에 입성할 자격요건을 갖추어 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 완벽하게 끌어안을 용기는 얻지 못했을지언정 말이다.      


편견이 흐릿해지니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보던 것을 새롭게 본다. 당면 위에 올려진 호두 토핑은 원래도 그리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야 깨달아가는 중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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