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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마담 Oct 03. 2022

상여자 특) 프로포즈 먼저 함 #8

이제 나와 그는 ‘세미’ 썸 단계를 넘어 ‘찐’ 썸의 단계를 밟고 있었다. 별일이 없다면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서로 수 백통의 연락을 주고받았다. 보통은 카톡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86년생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걸맞게 그는 카톡 못지않게 통화 역시 선호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출퇴근 길이나 점심시간에 맞추어 핸드폰 화면에 그의 이름이 뜨곤 했다.


썸 타는 여러 커플이 그렇듯, 이때는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서로에 대한 탐색과 함께 방대한 양의 정보를 알아내고 입력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모든 시간을 쪼개가며 나눈 수많은 카톡과 통화들은 나와 그, 둘 사이에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얘기들과 더불어 조금 더 깊은 대화들과 함께 히스토리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인생 이야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다소 거창할지 몰라도 사사로운 이야기를 넘어서 서로가 살면서 겪었던 일들, 그 일들을 통해 얻게 된 깨달음, 이를테면 신념이나 가치관들, 그런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는 내게 있어 이미 보통의 존재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한날은 마침 내가 일하는 근처에 들를 곳이 있다며 점심시간에 맞추어 그가 회사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근방에서 점심으로 쌀국수를 같이 먹고 옆 카페에서 짧게 커피 한잔을 했는데, 그건 정말 남자 친구가 짬을 내 여자 친구를 만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랄까, 아무튼 적당히 신선한 설렘을 안겨주었다. 약속이 있다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등 특별한 이벤트가 있을 땐 당연한 듯 서로에게 보고하는 것이 암묵적 룰이 되기도 했으니, 나는 이 관계를 사실혼이라는 단어에 착안해 사실 교제관계로 명명하였다.


만남과 연락의 빈도는 여느 커플에 못지않았어도, 나는 의아했다.    

 

왜 대체 그는 이 관계를 확실히 하려 하지 않는 걸까.


좀 또렷하게 관계 정립을 했으면 좋겠건만 그럴 생각이 좀체 없어 보이는 그에게 시비가 일기도 했다. 종종 나는 예정되어있으나 성사되지 않았던 소개팅을 언급하거나, 내게 호감을 드러냈던 몇몇 이성을 일부러 언급하면서 유치하게나마 나의 불만을 간접적으로 내보이곤 하였으나, 그는 우리 관계에 관한 이야기에는 웬일인지 말을 아꼈다.


그의 간명하지 않은 태도에 심술이 나긴 했어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라곤 할 수 없었다. 이해해보려 하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86년생인 그와 88년생인 나. 각각 서른여섯과 서른넷이니 시대가 변했다고 한들 둘 다 적은 나이로 볼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에게 호감이 크다고 해도 이 나이에 ‘삼세번의 법칙-남녀가 세 번의 만남 안에 관계를 정립함-’을 적용한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충분히 성급하다고 느낄 만한 일일 수도 있었다.


당시엔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우이동 카페에서의 첫 만남에서도 그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스치듯 꺼낸 적이 있던 데다가, 근래에도 몇 번 지나가는 식으로 ‘만일 결혼을 하게 된다면’이라는 말을 몇 번 하기도 했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던 터였다.


흠.      


내 잣대를 무턱대고 들이밀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보편적인 사람이라면 ‘결혼’이라는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결혼에 크게 관심 없이 단순한 낭만적 로맨티시스트로서 살아온 나는 그렇다 쳐도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 보긴 어려웠다. 서른여섯, 결혼에 적당히 뜻이 있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제 앞으로 몇 번의 연애가 남았다고 생각할까. 연애와 이별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이십 대처럼 마냥 낭만만 찾으며 들이대고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었다.


단지 그 문제 때문인지는 확실히 알 순 없어도 저런 이유라면 그의 신중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나도 쉽사리 썸의 단계를 넘어설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저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육칠 년 전 대학원을 함께 다녔던 것이 인연이 되어 년에 두세 번씩 만남을 갖곤 하는 동기 J를 건대에서 만난 어느 날 밤, 일 차로 회에 소주 한 병, 이 차로 낙곱새에 소주 한 병을 더 시켜 마시면서 나는 또다시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술로 인해 감정이 극대화가 되었는지 아까보다 나는 훨씬 격해져 있었다. 그에게서 온 카톡엔 친구를 만났다는 이유로 이따 연락하겠다는 답을 남겨놓고 나는 세 시간째 그에게서 온 답장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앞자리에 앉은 그녀가 짐짓 심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딴생각에 잠기려는 탓에 정신을 차리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오늘 오후, 그의 SNS를 한번 쓱 둘러보다가 하나의 게시물을 유심히 보게 된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가 미러 선글라스를 쓰고 천천히 미소를 짓는 영상이었는데, 이미 전부터 수십 번은 보았던 영상이었음에도 그의 하관이 워낙 매력적이었던 나머지 오늘도 역시 홀린 듯이 몇 번을 더 돌려보던 참이었다.


어라.


전에는 왜 미처 몰랐을까. 반사력이 상당히 높은 선글라스였다. 흐릿한 무언가가 렌즈에 비추어 보이는가 싶어 검지와 중지로 조심스레 화면을 확대해보자 선글라스에 비친 어떤 실루엣 역시 그만큼 커지고 있었다.     


뭐야.


지와 중지를 화면에서 떼지 않고 영상을 최대한 확대한 채로 자세히 살펴보니 그 실루엣은 노란빛이 도는 밝은 색 의상을 입고 있는, 그의 영상을 찍어주고 있는 상대방인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건 분명 여자였다.


‘의심 가는’ 댓글을 발견한 건 바로 그 직후였다. 그 게시물이 아닌, 비슷한 시기에 업로드된 다른 게시물을 클릭하자 사진 밑에 달린 다정한 말투의 댓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 이렇게 빤한 이야기는 싫은데.

      

여태 스스로 비과학적인 것을 꺼리는 편이라고 생각하며 이성적인 태도를 고수함을 자부하고 살아왔으나, 지금 난 제대로 ‘육감’에 매달리고 있었다. 여자의 ‘촉’을 무시할 수 없다는 그 대단히 전형적이고 진부한 문장은 어쩜 굉장히 일리 있는, 과학적인, 명백한 진리인지도 몰랐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최대한 통제하려 노력하면서, 이 떳떳하지 않은 ‘염탐’ 행위가 혹여 들킬세라 나는 촉을 발동시킨 ‘댓쓰니’의 계정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았다.


다행히 그녀의 인스타그램은 비공개 계정이 아니었고, 부끄럽지만 나는 최대한 빠르게 그녀의 게시물을 훑으며 그녀에 대한 몇 가지의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몇몇 게시물을 토대로 보았을 때, 그녀는


1) 결코 매력적이지 않다고 볼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고,

         

2) 맹세컨대 그녀의 내밀한 일상을 샅샅이 뒤져보려는 것은 절대, 절대로 아니었으나, 우연히 클릭한 몇 년 전 사진에는 그의 아이디가 태그 되어 있었다.

          

3) 하지만 그와 현재는 언팔 상태였다. (중요)


1)과 2)가 둘의 관계를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순 없어도 만일 그 둘이 친한 친구라면 3)이 되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사진에 태그를 걸어둘 만큼 절친한 사이라면 서로 쌍욕을 주고받지 않았고서야 언팔을 감행할 정도로 싸울 일이 뭐가 있겠는가.


누가 봐도 그와 그녀는 ex 사이임이 분명했다.


합리적 의심을 갖고 인스타 피드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런저런 증거들이 조금 더 보이는 듯했다. 그의 피드에서 보았던 곳과 동일한 장소, 같은 음식 사진들. 어느 시점-아마도 교제를 끝내기 전-까지 매번 모든 게시물에 ‘좋아요’를 표현해온 그의 흔적들까지.

      

SNS란 얼마나 위대한지…! 그녀의 내밀한 일상을 몰래 훔쳐 얻어낸 모든 것을 종합해보건대 그녀는 꽤 밝고 활달한 성향을 지닌 듯했고,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그리하여 현재 국내 항공사의 승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알아냈을 때, 나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 있었다.


, 뭐야. 이거였어?


뭐 어때. 다 지난 과건데. 이 나이에 연애 경험 없는 게 더 싫지, 그리고 과거라면 뭐 나도 자신 있는데, 뭐. 모르긴 몰라도 내가 더 진한 연애 훨씬 많이 했을 텐데, 뭐. 나는 짐짓 쿨하게 넘기곤 어플을 종료했다.


오늘따라 타이밍은 왜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는지. 핸드폰에 그의 이름이 뜬 것은 그때였다.

    

“담요에 오백 원 만한 구멍이 있길래 보니까 구멍이 아니라 다행히 얼룩이더라.”  

   

“...?”  

   

느닷없이 전화해서는 웬 뜬금없는 소리란 말인가. 담요는 뭐고, 얼룩이 졌는데 뭐가 어떻다고.  

   

“가평에서 담요 발로 밟은 거 기억 안 나지?”   

  

“제가 오빠 담요를 덮었어요?”  

   

“당신이 계속 춥다, 춥다 해서 내가 차에서 담요 꺼내다 줬잖아. XX항공 담요.”   

  

증거의 증명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합리적 의심은 그것이 얼마만큼의 불안함을 가져다줄지언정 아직은 의심에 불과하기에 견딜만했던 게 아닐까.


뭐 어때,라고 생각했던 방금 전 감정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XX항공’이라는 그의 말에 진실에 도달되었음을 확인하자마자, 이제 걷잡을 수 없이 감정이 증폭되고 있었다.

    

“아, 전화 들어온다. 좀 이따 연락할게요.”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전 여친의 흔적을 확인하자마자 갑자기 이렇게 쐐기를 박는다고? 이렇게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진정되지 않은 심장이 계속 세차게 뛰고 있었다.   


물론 내가 알아낸 것들을 꿈에도 알 리 없이,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얘기했을 것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심장박동으로 보건대 의도 없는 그의 말에 내가 받은 충격 또한 분명해 보였다.


주체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분출하지 않으면 왠지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핸드폰 화면을 띄운 뒤, 곧바로 나는 쇼핑 어플에 접속했다. 지체 없이 컴포터 하나를 결제하고, 받는 사람에 그의 이름을 기입하고, 마지막으로 메시지 창에 나는 이렇게 입력했다.    

   

- 이미 낡은 건 그냥 정리하시죠. 구질구질하잖아요. From. 연주     


그가 내 의도를 알건, 모르건, 그건 전혀 상관없었다.




낮에 있던 일을 상기하다 보니 어느덧 낙곱새는 건더기를 다 건져 먹은 상태로 국물만 조금 남아있었다. 동기 J가 한 병 더 마시는 것이 괜찮은지 내게 묻는 의미로 다 마신 진로 소주병을 들고 흔들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 여기 밥 볶아주시고, 이거 한 병 더요.

     

한 잔, 두 잔. 낙곱새의 국물 조금에 나물과 참기름이 섞인 고소한 볶음밥에 숟가락이 몇 번 가더니만 또 한 병이 금세 비워지고 있었다.

    

알코올의 힘은 얼마나 위대한가. 담요를 대신하라는 의미에서 컴포터를 보낼 때만 해도 어쩌면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것 같더라니. 애써 꾹꾹 눌러 담고 꽁꽁 감춰두었던 감정을 꺼내 드러내 놓고선 이렇게 뻥튀기를 시키고 있네. 소주 몇 병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연애했다는 게 문제가 아니야, 왜 흔적을 남기는 거야. 대체 왜 정리를 깔끔하게 안 하는 거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러데이션으로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예의가 아니잖아!


라고 생각하다가, 급작스레 내가 예의를 운운할 자격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말해 그와 나는 교제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그의 이런 행위를, 이유를, 예의를 따져 물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알코올의 파워를 얻은 상태였다. 그것은 지난번 대단했던 실수를 망각하게 함과 동시에 내게 또 한 번의 무모한 용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조만간 또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곤 건대입구 역에서 J에게 손을 흔들고, 나는 그제야 그의 카톡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시각으로부터 이제 벌써 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거의 매일같이 통화를 하면서 지냈어도, 용건이 없다면 내가 먼저 전화를 건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알코올의 파워는 대단히 강해서, 또다시 반성과 후회의 시간을 갖게 되리라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어느덧 나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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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마담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hong_ma_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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