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3년 정도 다닌 직장을 퇴사하고 두 달 남짓한 쉼을 가진 뒤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다. 여기에 오게 된 건 어떤 이유도 아닌,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회사가 제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는 제주로 왔어야 할 다른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좋겠다'며 부러움을 사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걱정이 앞섰다.
이 아름답다는 섬은 나에게 그저 대한민국 지도 맨 아래에 위치한 큰 점에 불과했고, 여행지로도 오래전에 다녀간 기억밖에 없는 곳이었으니.
게다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6년 전 첫 번째 스타트업에서 처음을 함께 했던, 지금 회사의 대표뿐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날 처음으로 만나게 된 이 회사의 이사. 당분간 가장 많이 마주치게 될 이 둘을 마주하는 것으로 제주살이가 시작되었다. 말-언어-는 통하는 외국에서 생활하게 된 기분이랄까.
그렇게 사계절을 돌아 두 번째 여름을 맞고 있는 지금, 제주에 온 지 1년 하고 4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시간마다 바뀌는 하늘과 날씨가 익숙해진 지금이 이 섬 생활에 흔들림 없이 적응하기까지 꼬박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는 제주가 아닌 다른 곳을 육지라 부르고, 인간관계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여름 제주 밤바다 풍경
| 제주생활 Chapter 2.
원하던 원하지 않았던 두 번째 여름, 제주에서의 생활에는 여러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그중 좋은 것 하나는 매일 눈을 뜨면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왔다는 것. 주변에 제주도 토박이 몇몇은 바다 앞에 산다는 건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고 말하지만, 파랑 초록으로 가득한 집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는 건 아직까지 질리지 않는다.
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바다는 진한 푸른색이었다가, 맑은 푸른색을 뗬다가 어떤 날은 회색빛이 감돌기도 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따라 변하는 게 바다색'이라 쓰면 시가 될까 싶었지만, 해가 얼마나 바다를 비춰주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집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
그리고 예상보다 너무 일찍 찾아온 시간. 이제 이번 달 말로 회사의 업무를 정리하기로 했다. 코로나로 인한 경영악화를 직면해야 했던 지난 몇 달. 불편하지만 마주해야 했던 순간에 '나는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먼저 꺼내고는 순간 잠시 후련했다가 갑자기 수심 30m 아래로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지러운 상황과 상황 속의 나를 분리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매번 선택의 기로에서 선택한 대상 그 자체에 의의를 두고 있었는지 아니면 대상을 선택하고 거쳐 갈 그다음 목적지가 더 중요했는지를 곱씹어보았다. 그럼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생각보다 명료했다. 결정을 내린 후에 밀려오는 아쉬움의 쓰나미와는 별개로 말이다.
애정을 쏟아온 이 회사와의 작별인사는 그저 덤덤하고 담담할 수만은 없었다. 정말이지 지금 나는 회사와 '이별'하는 중이다. 그래도 6년의 인연은 헛되지 않았는지대표와도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눈시울을 붉히고 한동안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토닥이는 어깨 위에 미련은 남기지 않기로 했다. 미안함은 덜고 고마움만 남기자고. 그리고 각자의 길을 잘 가자고.
| 제주를 즐길 일만 남았다
가장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연일 흐리기만 하던 제주 하늘에도 구름을 뚫고 나온 강한 햇빛이 바다로 산으로 인파를 끌어모으고 있다. 밖으로 나가 묵은 먼지를 탈탈 털고 젖어 있는 슬픔은 햇빛에 말려 날려 보내야겠다.
8월이면 나에게도 휴식이 찾아온다. 쉼 없이 달려왔으니 잠깐 쉬어 가는 것도 답이겠다 싶어 이왕 쉬는 김에 제주의 여름을 만끽하기로 마음먹고 '어떻게 보내야 여한없는 여름을 보낼까'를 고민하며 아직 그 계획은 무계획으로 남겨뒀다.
제주 여름바다 풍경
며칠 전, 차 트렁크에 한 달 전에 사두고 아직 펼쳐보지도 못한 캠핑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날이 많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는 날이 많을 것 같다.
제주살이에 대한 낭만은커녕 어떠한 기대도 없이 왔지만, 바쁘게 그런 와중에 또 조금은 외롭게 모든 계절을 보내고 나니 알게 되었다. 힘이 들 때면 위로가 돼주던 산과 바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오고 가는 사람들과 함께 보낸 하루하루가 돌아보니 낭만이고 행복이었다는 것을.
사방이 바다인 이곳에 얼마나 더 있을지는 아직 기약하지 않았다. 지내온 시간보다 더 짧아질지 길어질지는 모르지만, 있는 동안은 이곳을 보고 느끼는 만족의 역치 값을 낮추고 더 작은 것에 반응하며 살아보려 한다.
이제 제주를 즐길 일만 남았다.
P.S. 오늘 읽은 이원하 시집 '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중 한 구절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이제 세상도 내가 속한 그 주변도 '확실함'과 '변치 않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시인이 말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