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인생의 전반부를 기지의 세계에 존재했습니다. 기지의 세계는 생존과 경쟁이 치열하지만 안정과 보상이 가시적인 다수의 세계입니다. 나름의 성공의 방식이 있고, 뚜렷한 성과와 결과가 보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경쟁합니다. 다만 치열하고 힘들지만 정신적인 안정감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세계에 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외부에 저의 가치를 입증하고 증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스마트하거나 강한 의지가 있지도 않으면서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모든 것들이 제대로 작동할리 없었습니다.
주말도 저녁에도 나를 증명하기 위해서 무언가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만히 있는 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져지는 것 같고, 도태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삶은 일단 불행했고, 내면 깊은 곳에서 성장한다는 느낌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쉴 새 없이 활동했지만 제 삶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습니다. 생존의 세계는 기지의 세계입니다. 나름의 성공의 방식이 있고, 뚜렷한 성과와 결과가 보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경쟁합니다. 다만 치열하고 힘들지만 정신적인 안정감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 몸과 마음은 저를 붙잡아주었습니다. 일단 몸이 고장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허리가 삐끗하더니 앉아있기도 힘들어졌습니다. 어깨와 목은 언제나 굳어있고 항상 몸이 찌뿌둥해서 나쁜 컨디션 속에서 겨우겨우 살아갔습니다. 정신은 고도로 지쳐갔습니다. 여행을 가도, 주말에 휴식을 취해도 회복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이 절실하게 변화된 삶을 요구해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제가 붙잡고 있었던 기지의 세계에서 나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높은 연봉의 회사를 퇴사하고, 끊임없이 비교하고 견제하고 서로 이용가치를 재던 관계를 정리했습니다. 그냥 그렇게 훌쩍 나와버렸습니다. 저는 그 세계와 잘 어울리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세계에서 높은 곳까지 오르고 싶었지만 다행히도 별 재능도 없고, 의지도 약하고, 무엇보다 행복하거나 즐겁지 않았습니다. 빠르다고 할 순 없지만 다행히 제 기준에서는 인생의 전반부에 생존의 세계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합니다.
기지의 세계를 나와 저는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는 불확실하고 불안하지만 창조적이고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입니다. 저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내면에서 '미지'에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사회의 전형적인 성공을 이룬 인물들보다는 미지의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 예술가나 사업가들에게 매료되었습니다. 물론 미지의 세계는 말은 근사하지만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잘 알려진 노하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소수의 세계이기 때문에 외롭습니다.
저는 지금 돌이켜보면 전형적인 미지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미지의 세계에 당연히 따라오는 불확실성과 외로움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가 없어서 중년이 되어서야 이 세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자 숨을 쉴 수 있게 되었고, 완벽하진 않지만 종종 기쁨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두 세계는 옳고 그름의 영역이라기보다 그냥 MBTI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질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저는 기지의 세계에서 오랫동안 생존하며 성공하고 사회에 기여하며 행복하게 사는 분들을 보면 경이롭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없는 것들을 동경했다는 사실이 듭니다.
다행히도 현대사회는 조금씩 기지의 세계의 속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에게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되는 것 같습니다. 사회가 급변하고 새로운 질서가 출현할 때마다 미지의 세계를 추구하던 사람들이 출현하고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현대의 시기를 과거 중세 유럽의 페스트 시기와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암흑의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르네상스라는 화려한 역사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르네상스를 연 사람들은 대부분 기지가 아닌 미지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 이야기의 시오노 나나미와 같은 작가는 르네상스를 만든 이들에게 '창조'는 올바른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저의 이런 넋두리도 제 선택에 대한 합리화일 수 있습니다. 다만 저와 같이 미지의 세계를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더 많이 출현하고 성공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길이 두렵지만 도전해볼 만한 세계라는 것을 세상이 알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성공이라는 결과와는 상관없이 하루하루가 비교적 충만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앞으로의 삶의 소명이 미지의 세계로 진입을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의 매력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명상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