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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래 Oct 24. 2022

보라 당근, 흰 당근

빨간 꽃, 노란 꽃 말고 

비건지향 모임에선 자기소개를 할 때, 어떤 연유로 비건 지향에 눈을 뜨게 되었는지 자신의 동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보통은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기후 위기에 심각성을 느껴서, 혹은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이 비거니즘 모임의 주요한 원인이다. 엄격함이 살짝 풀린 채식지향인들의 모임에선 ‘건강', ‘디톡스' 같은 이유도 자주 등장한다. 다만 비거니즘은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는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비거니즘을 지향하는 곳에서는 개인적 차원의 동기는 조금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기도 한다.

최근엔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육식 생산-소비량 자체를 줄이는데에 첫번째 목표를 두자는 흐름이 크기 때문에 동기와 상관없이 어떤 비건 지향이든 환영받는 분위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건지향을 시작하고, 한 걸음 두 걸음 내딛을 수록, 비거니즘이 무엇이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할 수록 보다 더 공감되는 쪽으로 자신의 실천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완벽한 비거니즘'을 실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의 활동은 어떤 방식으로든 탄소를 배출하고, 지구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지 때문이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건너오는 수입산 야채들을 모두 배제한채, 시골에서 트럭을 타고 올라오는 야채들을 배제한채 자급자족 하지 않는 이상, 비건을 실천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중립적인 삶을 꾸려갈 수는 없다. (아마도 실천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그럴 때 무엇이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가장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중요하고, 소중한 것 같다. 그 과정을 지나고 나면, 내가 동물권에 동의해서인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동의해서인지 등 새로운 실천 동기가 만들어지고, 그에 맞춰 다른 동물권 운동을 한다던지, 제로웨이스트 등의 기후 위기 실천으로 행동을 확대하거나 이어가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동물권도 기후위기도 아닌 조금 다른 이유로 비건지향이 시작되었다. 조금 어렵지만 한마디로 표현해보자면, 획일화에 대한 저항이라고 해볼까? 획일화의 반대편엔 다양화가 있으니, 문화적 다양성, 종 다양성 등 다양함에 대한 지지라고 표현하는게 나을까? 모르겠다. 피를 불끈 불끈하게 하는 것은 저항이었겠지만,  마음을 두근 두근 하게 하는 것은 다양성이었기 때문에, 강약중간약으로 박자를 타며 생각이 만들어졌고, 결과적으로 ‘이거다!’라고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동기를 갖게 되었다.

한국에 ‘비건'이라는 말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 한달에 1주일간 채식주간을 갖는 친구 덕분에 비건이라는 개념을 접하게 되었다. “채식주간이니 나 빼고 식사 해" 하며 자리를 비켜주려는 친구에게, “아니야, 야채 위주로 먹으면 되지. 야채 메뉴 있는 곳 가자!” 하고 고민하다가 다같이 베트남 쌀국수집에 가게 되었다. 친구는 스프링롤을 시켰고, 나머지는 이것저것 식사메뉴를 시켰다. 메뉴가 나오자 친구는 난처한 얼굴로 “나 이거 못먹겠다. 너희 먹어" 하고 나눠주었다. 스프링롤에는 새우는 빼달라고 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맛살과 계란이 들어있었던 거였다. 비거니즘에 완전 무지했던 우리는 “계란 못먹어?” “맛살도 못먹어?” 하며 질문을 쏟아냈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동물성을 완전히 배제한 라이프스타일인 비거니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아마도 “비건 채식 왜 해?”, “너무 극단적이지 않아?” 같은 멍청하고 무례한 질문을 쏟아냈을 것이다. 분명히 그랬겠지. 그러다 냉큼 “나도 할래!” 하며 채식 주간에 동참하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완전 채식을 하든, 뭘 하든, 어떤 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삶을 기획하고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는다면, 그것을 막는 불필요한 장애물이 없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상식에 기반하고 윤리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면, 누구나 개인의 선택을 존중받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똑같이 살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대로 말하고, 말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 지금은 오히려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채식을 강요하지 말라고 소리를 높이지만, 그때는 때때로 채식을 한다는 말 자체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던 때였다. 종종 아만자에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은 그때의 내 선택을 ‘비건권에 대한 지지'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누구나 비건을 선택할 권리가 있고, 비건으로서의 삶을 누릴 사회적 인프라가 확충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햇수로 9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기업에서 비건 간편식을 내놓고, 프랜차이즈나 식당에서 비건옵션을 갖추어가는 지금의 모습은 비건권에 대한 생각이 많이 확산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운동의 측면보다, 소비자가 있으니 제공한다는 측면히 훨씬 앞서가지만, 모로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을 이 글에서는 긍정해본다.

이렇게  불완전한 파트타임 비건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달에 1주일을 채우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친구의 비건권을 지지한다는 걸로는 동기부여가 부족했던 걸까? 나의 채식주간은 자주 딜레마를 마주했다. 나는 여러가지 비거니즘의 동기 중, 기후위기의 심각성과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탄소배출에 가장 큰 동의를 했었다. 하지만 나의 경우 원래 육식소비량이 많지 않으니, 비행기 안타기를 다짐하는 것이 훨씬 유효한 실천 아닐까? 공장식 축산으로 인해 고기가 생산되는 방식보다 야채가 생산되는 방식이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야채 역시 플렌테이션을 통해 공장식으로 생산되는데 말이지.

고민이 깊어질 수록 비건지향에 대한 마음도 시들해졌다. 대신 다른 마음이 열렬해졌다. 공장식 축산, 공장식 농업, 그런게 문제라면... 그러니까, ‘공장식 생산'을 거부할 수 있을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지 않았던 열렬한 마음이, 공장식으로 생산되지 않은 것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어졌다. 마침 농부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파머스마켓이 서울에 종종 등장할 때였다. ‘얼굴있는 시장, 서울 농부의 시장', ‘대화하는 시장, 마르쉐@' 같은 곳에서 공장과 시스템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이 키우고 수확한 농산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야채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런 고기들, 꿀 등 동물성 생산물도 있었다. 그때 서울 농부의 시장에는 “농사는 예술이다.” 라는 커다란 플랑이 걸리기도 했다.

마트에서 볼수있는 가지런한 크기의 사과들, 호박들, 온갖 과채들. 어떤 인간의 무리를 표현할 때 ‘균질한 등급'이라고 하는 것이 비인간적인 표현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농산물의 ‘균질함'이 어느순간 서늘하게 느껴졌다. 균질함과 획일성이 아닌 다양성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균질하지 않은 존재라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세상. 잘 팔리고 선호도가 높은 품종만 대량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양과 맛과 향을 가진 품종을 골고루 길러내는 사회. 나는 자꾸 과일과 채소에 나의 처지를 대입시켜보게 되었다. 혹은 다른 작가들, 예술가들, 유별나게 뭔가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대입시켜보게 되었다. 농사가 예술이라는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다시 비건 지향 생활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비건지향이라고 하긴 어렵고 플랜트베이스의 식생활이 즐거워졌다고 표현해야 정확할 것이다. 온갖 야채를 하나의 팬에 때려넣고 허브솔트를 뿌려 볶아먹던 나의 요리는 버섯만 넣고 먹어보기, 호박만 넣고 먹어보기, 감자만 넣고 먹어보기같이 야채 하나하나의 다른 맛을 탐구하는 여정이 되었다. 호박, 버섯, 감자, 가지, 양파를 다 넣고 만든 요리는 토마토소스를 넣어도 간장소스를 넣어도 똑같은 맛처럼 느껴졌는데, 오히려 야채의 종류를 줄이고 주인공 야채의 맛에 집중하니 매번 다른 맛을 가진 요리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원래 한국에서 생산되던 배(과일)의 품종이 21가지가 넘었었다는 글을 보았다.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배의 이름은 ‘신고배'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21가지의 배가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생산되고 있다니. 이 기사를 읽고 나서는 내가 먹는 과일과 야채들의 품종을 고민하며 먹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유난스러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각기 품종에 대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감귤파와 오렌지파가 나뉘고, 한라봉파와 레드향파가 나뉘는 것처럼. 더 새콤한 맛, 단단한 육질을 가진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더 달고 부드러운 육질을 가지고 있는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 책을 읽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보통은 마트에서 식재료를 구입하는 우리가 품종을 따져가며, 식감과 당도 같은 것들을 따져가며 식생활을 이어가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마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는 많은 농부들은 판로를 만들고 유지하는데에 어려움이 생기고, 자기 농사의 지속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안타까운 상황을 시장 논리로 설명하면서, 능력없는 것이 도태되는 자연의 섭리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물론 시장논리는 자연의 섭리가 아니다. 시장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일 뿐) 사실 그건 너무 납작한 생각이다. 시장논리는 사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더 저렴하게 생산하고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것, 균형점을 임의로 만들어서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 있고, 수요가 만들어지고 공급이 조절되는 마법은 소비자들에겐 가려져있으니까. 이걸 ‘개인'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품종에 유난스러울만큼, 이 세계에 진심인 사람들이 필요했다. 아마 그 사람들이 국내 생산되는 품종 혹은 토종품종에 관심을 갖고 소비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를 통해 새로운 과일과 야채 품종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다면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내가 생각한 사람들은 바로 파인다이닝 세계의 셰프들이었다. 독보적인 한 접시의 요리를 만드는데 누구보다도 진심인 파인다이닝 셰프들이라면, 이 수많은 품종의 다양성을 누구보다도 더 가치있는 세계로 인지할 거라고. 이 연결을 지지하고 싶어서 파인다이닝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업 ‘샘표'에서 파인다이닝 셰프들을 초대해 한국의 토종 품종들에 대한 맛 워크숍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지금은 한국의 파인다이닝 셰프들이 특정 농부님과 계약재배 방식을 통해 희귀한 야채를 주문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농부들은 안정적인 판로를 개척하면서 자신의 농사 실험을 지속하고, 셰프들은 농부가 생산한 유일무이한 야채를 가지고 독보적이고 참신한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 나는 당분간은 이 연결을 꾸준히 응원하고 싶다.

몇 년전 농사펀드라는 곳에서 부사, 홍옥, 양광, 로까라는 이름을 가진 4가지 품종의 사과로 만든 4종류의 사과즙을 샀다. 모두 사과 맛이면서도, 같은 과일인가 싶게 다른 매력이 도드라졌다. 누구라도 다른 품종의 사과인걸 인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최근엔 ‘취향에 맞는 딸기 찾기 그래프'가 SNS를 타고 확산되었다. 육질과 맛, 당도에 따라 나는 메리퀸이야. 나는 설향이야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점점 더 다양한 선택지를 가진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코로나 이전, 마지막으로 다녀온 여행지는 일본이었다. 도쿄 북부 코엔지 근처의 어느 한적한 주택가를 걷다가 커다란 박스에 야채를 쌓아놓고 파는 수더분한 야채가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백화점의 식품관도 아니고 번화가의 파머스마켓도 아닌 동네 야채가게에서 당근만 4종류를 파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보라색의 가지당근, 노란색 당근, 주황색 당근과 흰 당근. 꼭 보라색 당근을 써야만 요리가 완성된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파인다이닝 셰프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취향과 선호에 따라 다양한 품종의 야채를 소비하고 그를 위해 다양한 품종의 야채를 각각의 방식으로 생산하는 농부들이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꿈꾸며,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의 메뉴를 훑어본다. 이번 달엔 어디에서 독보적이고 참신한 요리를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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