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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래 Oct 30. 2022

괴식과 참신한 사이 어디에서

낯섦을 받아들이는 일 


그날은 급식에 ‘옥수수 스프'가 나오는 날이었다. 스프가루를 잘 개어 한참을 저어 끓이는 급식 스프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밥과 스프, 김치, 마카로니양배추 사라다, 윙 같은 구성으로 은색 식판이 채워지는 날. 나는 밥과 스프를 살짝 섞어 김치를 한조각 얹어 먹는 것을 좋아했다. 오뚜기 카레를 먹으면 김치가 생각나는 것처럼, 오뚜기 스프도 나에게 그런 메뉴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날, 지금으로 치자면 ‘괴식' 논란이 터졌다.


역겹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반 친구들이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니 거기서 의기소침해지거나, 당황했다면 그날로 왕따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그 상황 자체가 의아했다. “너네는 어릴때 이렇게 안먹었어? 엄마가 이유식처럼 이렇게 안해주셨어?” 내가 당당하게 되묻자 오히려 애들이 당황했다. “스프 끓일때 쌀을 먼저 같이 넣으면 리조또고, 쌀을 따로 익혀서 섞으면 이렇게 되는거야. 너네 라이스 그라탕 안먹어봤어? 그게 이상해?” 크림 소스에 밥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던 아이들은, ‘리조또' 혹은 ‘라이스 그라탕'과 같은 범주에 놓인다는 사실에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나는 유유히 나의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많다. 예를 들어, 간장계란밥에 참기름파와 버터파가 나뉘는 것. 나는 각각을 좋아했지만, 참기름과 버터를 함께 넣는건 참을 수가 없었다. (안넣는 것도 참을 수 없음) 중학교때는 신화의 에릭이 라면에 우유넣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기겁을 했었다. 그때는 ‘로제'라는 단어가 분식집에 등장하기 전이었다. 지금이야 익숙한 음식이 되었지만, 김치 피자 탕수육이 세상에 처음 등장했을 때도 괴로웠다. 머릿속에 각기 다른 범주에 있는 각각의 음식이 하나로 합쳐질 때의 당황스러움과 난감함. 각자가 성장하며 접한 환경과 범위에 따라 새로운 음식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나는 한국이 유난히 ‘생각과 다른 음식'에 야박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낯선 재료, 낯선 맛의 조합에 거부감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옛날보다는 나아졌다고 생각하는데, 그 과정을 관통한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사람들이 ‘단 하나의 레시피'가 지역 문화에 따라 어떻게 변주되는지를 즐기기 시작하면서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대다.


2010년대 가까워져서 갑자기 “너네는 순대 뭐에 찍어 먹어?”가 한국 도시의 지역색을 드러내는 질문이 됐었다. 전주는 초장을, 대구는 막장을 찍어먹는다는 이야기에 “순대는 소금 아니야?” 하며 아연실색하면, “이래서 서울애들이랑은 뭘 못 먹어" 하며 놀림을 받는, 서울중심의 그동안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졌다. 모로가도 서울 방법만 이야기하면, 그야말로 촌스러운 사람이 되버리는 거였다. 마치 해외경험이 많은 친구가 기름진 외국음식을 잘 먹는 것이 세련됨의 상징이었던 90년대처럼, 이제는 전국의 다양한 음식문화에 두루 익숙하고 즐겨야 ‘내일로' 여행 좀 다녀본 사람이 되는 거였다.


7일동안 무제한으로 기차를 타며 전국을 누빌 수 있게 된 이 세대에게는 각 도시별로 꼭 먹어야하는 음식과, 꼭 가야하는 장소들이 Top 7같은 방식으로 주어졌는데, 그중엔 각 지역의 음식을 비교체험하는 컨텐츠도 많았다. 서울애들은 전주에서 가장 유명한 국수집인 베테랑 칼국수에 가서 콩국수를 시키고는 서울과 전혀 다른 비주얼에 기겁하고, 콩국을 한입 떠먹고는 더 기겁했다. 전주에서는 알밤막걸리를 먹었지만, 강릉에 가선 옥수수 막걸리를 먹으며 한국지리에서 배운 내용을 몸으로 되새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음식의 디폴트 값에 다른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안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이 있다면 음식을 만들어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가능성이 조금 넓어지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 경험을 바깥으로 조금만 확장하면 다름을 이해하기가 좀 수월해진다. 깻잎을 즐기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뿐이고, 역으로 우리에게 힘든 채소인 고수는 한국과 일본을 빼고 전세계에서 즐겨먹는다는 것을 알게되는것처럼. 가지라는 채소가 거무죽죽한 가지나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튀김, 가지구이 등으로 나라마다 다양한 가지 레시피로 요리될 수 있고 가지의 맛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식재료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혹은 전혀 다른 재료를 비슷한 방식으로 요리하는 것을 보고 나면 머릿속에서 ‘괴식'이 설 자리가 조금씩 줄어든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가이드북에 ‘똠양꿍 주의'가 태국의 역사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뤄졌었다. 지금은 아주 작은 동네에서도 발에 채이는 것이 동남아음식점이고, 한국식 주점의 메뉴에서도 똠양꿍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여행과 경험을 즐기고, 맛의 다름을 아는 일이 즐거움이 되고, 다름을 수집하고 변주해온 약 20여년의 시간이 지금 한국 다이닝씬을 즐기는 소비자를 만들어내는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음식에 치즈를 뿌리거나, (아니면 발사믹 글레이즈드를 뿌리거나) 모든 음식에 로제버전이 생기는 효과를 낳기도 했지만 말이다. (유행의 속도는 언제나 빠르니까)


‘괴식'이라는 개념은 실제로 얼만한 존재일까? 아무래도 괴식이라는 개념이 가장 확실한 곳은 각종 먹을거리를 다루는 미디어인 듯 하다. 먹방채널에서도 출연진이 특정 음식을 괴로워하면 마치 그것이 괴식인양 굴고, 요리프로그램에서도 요리사의 어떤 시도를 출연진이 괴로하면 ‘괴식'인 것처럼 군다. 첫번째 장면은 그저 그 출연자의 먹을거리 경험이 그렇게 협소하다는 것밖에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고 (각종 여행프로그램에서 음식투정하는 모습들이 그렇다), 두번째 장면은 음식을 하고 있는 요리사 앞에서 어디까지 무례할 수 있는지 보여줄 뿐이다. (물론 한참이나 논란이 되었던 맹모닝 사건 등은 보류하기로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요리'이지 ‘맛'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맛은 단순하다. 다섯가지의 맛과 감칠맛, 고소한 향 등을 어떤 재료를 써서 조합해낼 것인지를 고려하여 요리를 만들 뿐이다. 진리라고 일컬어지는 ‘단짠'의 조합, 이 세계에 얼마나 다양한 버전이 있을까? ‘맵단'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단맛'의 재료와, ‘매운맛'의 재료가 있을테니까. 재료의 조합이라는 이 경우의 수를 ‘우리가 아는 재료'에만 한정시키기엔 각각의 재료가 가진 매력이 너무 많다. 그렇게 따져본다면 과연 ‘괴식'이라는 개념이 실제하는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괴식에 대한 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파인다이닝을 즐길때 꼭 필요한 ‘상상력' 때문이다. 파인다이닝의 음식은 예상치 못한 재료를 익숙한 재료와 함께 사용해 요리사의 끗발을 보여줄 때가 많다. 그 끗발에서 오는 새로운 즐거움이 매번 익숙한 스테이크를 써는 것보다 즐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파인다이닝의 메뉴는 보통 아주 친절한 경우와 불친절한 경우로 나뉘는데, 아주 친절한 경우는 재료를 어떻게 조리했는지까지 알려주는 메뉴판이고, 불친절한 경우는 조리법은 생략한 채로 들어간 재료만 나열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이렇다. <오늘의 생선 - 갈치, 유자, 마늘, 참나물>


하지만 어떤 메뉴판이든 내가 아는 완성된 음식의 이름이 있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우선 상상을 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아는 갈치는 무슨 맛인지. 그 맛은 이 음식에서 무엇을 담당할지. 갈치는 아마도 짠맛이겠지? 그리고 유자와 마늘은 익숙하고도 낯선 향을 입혀 갈치의 맛을 더 다채롭게 만들어주겠지. 참나물은 익혀나올까? 생으로 나올까? 혹시 갈치는 팬프라이일까 아니면 육수를 부어 나올까? 그런 맛의 조합을 상상하며 메뉴를 고르고, 그 메뉴가 내 상상과 같은지 아닌지, 나의 상상을 뛰어넘었는지를 확인하는 상상력의 맛이 꽤나 중독적이다.


- 이를 위해선 메뉴판에 주로 사용되는 조리용어를 알아두면 조금 편리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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