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래 Jan 16. 2023

창업 2년차, 직무를 바꿨다

2023.1.9 ~ 1. 15) 나 이제 기획자 은퇴한다 

우리 회사는 구성원이 2명 뿐이지만, 아주 제대로 각을 잡은 시무식과 종무식을 치른다. 팀원과 나 모두 한 해를 기준으로 업무가 정리되고, 다시 시작되는 공공영역에서 오래 일을 해왔기 때문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업무리듬이 그에 맞춰져있어서도 그렇고, 내가 오랫동안 몸담고 사랑했던 전 직장의 종무식과 시무식 문화를 아주 좋아했기 때문도 있다. 종무식은 구성원이 자신의 한 해 업무와 성장을 발표하고, 시무식 땐 대표가 앞으로의 비전과 한 해 계획을 발표하는 아주 심플한 계획이지만, 이제는 대표니까 이번 주 가장 큰 과제가 바로 시무식 준비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시무식 전, 긴 연초의 휴가를 보내며 (출근만 안했을 뿐 휴가는 아니었지만) 깊은 수렁에 빠져있었다. 으쌰으쌰하는 검은 토끼의 기운으로 힘차게 한 해를 시작해도 성공 가능성이란게 희박할텐데 눈물을 흘리며 땅을 파고 있었으니 스스로가 얼마나 싫었는지. 그래도 그렇게 죽으란 법은 없는지, 다행히도 이번주가 되기 전에 동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동굴 밖으로 나가서, 이렇게 살면 되겠다- 라는 희끄무레한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놓치고 싶지 않아 지푸라기 붙잡듯 그걸 쥐고 빠져나왔다. 


내가 붙잡은 지푸라기는 바로 직무를 바꾸는 것이다. 최근 텀블벅 프로젝트를 하나 수행하고 마치면서, 잘 팔지도 못하고 제대로 팔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팔 생각도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며 너무 충격을 먹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내 걸 팔아준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는거지? 그동안 파는게 내 일이 아니었다고 해서, 파는 게 내가 잘 하는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지? 각성을 했으면 변화하면 될 일인데, 그대로 '나는 글렀어~~~' 이러고 땅파고 들어간 게 연말의 연약한 나였다. 


나의 이 결연한... 마음을 시무식 발표에 그대로 녹여냈다. 나는 이제, 새로운 직무를 취하고 바닥부터 그걸 배우면서 내 에너지를 200%로, 300%로 쓰겠다. 늦은 만큼 더 버닝하겠다. 우리회사에 이제 기획자 정소민은 없다. 나 역시 기획자의 삶을 은퇴하겠다. 나는 대표이자, 대표 강사이자, 커뮤니케이션 총괄로 일하겠다. 이제 우리 회사에 기획자는 000님 한 명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올해 우리 회사에서 나오는 기획의 완성도는 000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기획자(a.k.a 문화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이 정말 진하고, 크기 때문에 이날 나의 발표는 내 나름대로는... 거의 출가 선언이나 비슷한 무게감을 가진 결심이었다. 실제로 발표 전/후로 업무노트와 투두리스트의 레이아웃에서 업무의 우선순위와 종류를 바꿨다. 매주, 매월, 매 분기의 할일과 목표가 새로 정해졌고, 커뮤니케이션 총괄로서 일을 할 때의 모드라는 것을 잡아가고 있다.


작년에는 '대표'가 되는 것에도 몇 개월이 걸렸다. 촉망받는 기획자, 회사에서 신뢰하는 직원인 나를 버리는 일. 대표가 되고, '선택'과 '결정'이 업무인 사람이 되는 운명을 받아들이는 말로 하면 너무나도 간단한 이 과정에 쓴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래서 이제까지 기획자이자 대표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기획자도 완전히 버려버리고, 대표이자(유지) 마케터로(신설) 새로운 커리어패스를 시작해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