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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외계인 May 04. 2024

라떼와 혜선 대리


S 전자 수원 디지털 시티 R5 1층에 '가배두림'이라는 직원 전용 카페가 있었다. 내방객실 앞에 자리잡은 작은 카페는 28층짜리 건물에 상주하는 직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러봤을 법한 곳이었다. 주로 바쁜 아침 출근시간이나 점심시간 후, 테이크 아웃 전문으로 운영되는 곳이라 구수한 커피 향과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는 곳이라기보다는, 커피를 쉴 새 없이 뽑아내는 제조 공장에 더 가까웠다. 몇 평 남짓한 공간에 직원만 해도 일곱 여덟 명은 족히 되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르고 정확하게 주문을 처리하고 커피를 찍어내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신입사원 연수 때 경험한 경북 구미의 스마트폰 생산라인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배두림은 사내 직원 전용 카페라 시중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커피를 공급했는데, 아메리카노 가격이 일반 카페에서 4500원 정도 할 때, 사원증을 찍고 사내로 들어오면 2500원 정도에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개이득) 이렇게 착한 가격의 커피를 제공하는 회사의 훌륭한 복지 제도를 찬양했던 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얼른 마시고 빨리 일하라는 회사의 큰 그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가배두림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피곤한 육체에 카페인을 수혈하고 동료들과 정보 교류를 빙자한 잡담을 나누며 회사 생활을 버텼다.


아침 출근 카페인 수혈은 필수!


하루는 나보다 한 살 어리지만 일 년 먼저 입사해 선배인 혜선 대리와 커피 타임을 가졌다. 혜선 대리는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나는 여느 때처럼 라떼를 주문했다. 혜선 대리는 나와 대학교 동문이기도 했는데 업무상 겹치는 일이 별로 없고, 입사년도도 다르다 보니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었다. 다만 가끔씩 톡 쏘는 말투로 한참 위인 차부장님들을 당황케 하는 혜선 대리를 보면서 역시 할 말은 해야 되는 사람인가 보다 했다. 그런 면이 때로는 (아주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신통하기도 했다. 그 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그 땐 엄청 중요했지만 지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상사에 대한 불만이나 조직 개편에 대한 루머이지 않았을까. 아무튼 이야기를 끝내고 일어서려는데 혜선 대리가 여태껏 라떼를 신나게 홀짝거리며 마시던 나를 그 크고 똥그란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언니, 근데 도대체 라떼는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빛을 마구 초롱 거리면서. 나는 식어버린 라떼에 입술을 데일 뻔했다.   

 

라떼는 말이야...


그렇다. 나는 카페에 가면 꼭 라떼만 시킨다. 짠순이인 내가 꼭 500원, 1000원을 더 주고서라도 유독 라떼만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언제부터 라떼를 좋아하게 되었나? 나는 도대체 무슨 맛으로 라떼를 마시는가? 생각해보면 아메리카노와 라떼의 차이는 물이냐 우유냐인데 사실 나는 원래 우유를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라떼를 마시면서 우유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다. 어렸을 때 나는 아침에 우유만 마시면 배가 아팠다. 내가 초등학교 1, 2학년 때 어린이 우유 마시기 운동의 일환으로 아침마다 교실에 (차갑고) 신선한 우유가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에 배달되곤 했다. 우유 급식이라는 말도 있었고 우유 급식 당번도 돌아가면서 했다. 반 아이들은 모두 예외 없이 담임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우유를 매일 마셔야 했는데 내게는 그게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다. 우리 반에 덩치가 크고 뚱뚱한 정민호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걔는 우유를 3초 만에 다 마시기로 유명했다. 나는 걔한테 500원을 주고 우유를 대신 먹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을 정도로 그 시간을 싫어했다. 여름방학 전 학급 대청소 시간에는 내 사물함에서 몰래 꿍쳐놓은 우유가 발견되어서 선생님께 혼이 난 적도 있다. 얼마나 오래됐는지 우유팩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화장실에 버리러 갔더니 요구르트처럼 굳어져서 애를 먹은 기억도 있다.

 


대학생이 되어 아메리카노라는 신문물에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유의 기억만큼이나 생생한 내 연약한 위장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다. 한약에 버금가는 아메리카노의 쓴 맛을 내 위장은 견뎌내질 못했다. 지금도 나는 아메리카노 한 잔을 끝까지 다 마셔본 적이 없다. 사실 딱 한 번 있는데 교환학생으로 캐나다에 왔을 때 밤새워 시험공부를 하면서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한 잔을 다 마셔봤다. 그땐 맛으로 마셨다기보단 악으로 마셨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시험이 끝나자마자 화장실을 거의 하루 종일 들락거렸다. 시험이 아침 일찍 끝났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어떻게 됐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 후부터는 이상하게 아메리카노만 먹으면 배에서 꿀렁 소리가 난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배가 고픈 것처럼 속 빈 소리가 나서 민망하기 그지없다. 밤에는 또 어떤가. 아메리카노는 독한 카페인을 위장에 여과 없이 들이붓는 기분이어서 밤에 구름 탄 듯 가슴이 벌렁거리고 잠이 안 온다.    


아메리카노냐, 라떼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떼는 어떤가. 괴로운 기억으로 남은 차디 찬 아침 우유 급식은 어른이 되면서 저절로 나아진 건지 따뜻한 우유라서 나아진 건지 커피와 만나면서 묘하게 치유가 됐다. 따뜻한 우유 덕분인지 아침을 거른 날 라떼 한 잔에 쿠키나 에너지바 같이 가벼운 간식을 곁들이면 점심때까지 속이 든든하게 채워지는 기분이다. 또 따뜻한 우유가 위벽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는지 속이 쓰리지도 않고 훨씬 부드럽게 넘어간다. 속이 편하니까 남김없이 커피를 다 마실 수 있는 것도 이득이다. 한동안 늘 카푸치노만 주문하던 때도 있었는데 나는 불필요한 거품은 빼고 우유 맛이 더 진하고 속이 꽉 찬 라떼가 더 잘 맞는다. 라떼 아트 또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땐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라떼가 너무 뜨거워서 별생각 없이 뚜껑을 열었는데 웃는 얼굴이나 하트표 같은 라떼 아트가 짠 하고 나타나는 것도 소소한 재미다. 이런 속 편하고 사소한 기쁨은 500원에서 1000원을 더 지불할 만한 값어치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500원 값어치 충분히 해내는 라떼아트


이렇게 똑부러지게 대답했으면 좋으련만 그 날 나는 혜선 대리의 초롱거리는 눈빛에 당황해 그만 “허허 글쎄” 하고 말았다. 커피에 정답이 어디 있겠나. 사람마다 성격도, 외모도, 사연도 다르듯 커피도 그냥 취향껏 즐기면 되는 거다. 이런 것은 애초에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라떼 예찬을 늘어놓는다한들 혜선 대리는 여전히 아메리카노를, 나를 여전히 라떼를 마시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문제가 없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나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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