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엄마는외계인 May 11. 2024

헤이즐넛 커피와 카페사장형

삼박자를 시작으로 달달하고 부드러운 우유 커피만 찾던 나는, 헤이즐넛 커피를 만나면서 비로소 블랙커피의 세계에 입문했다. 한약처럼 입에 쓰고, 속도 같이 쓰린 아메리카노에 비해 달달한 헤이즐넛 향기는 블랙커피에 대한 나의 편견을 부드럽게 무너뜨렸다.


헤이즐넛 커피는 일반적으로 카푸치노나 라떼에 비해 가격이 좀 더 저렴할 뿐 아니라, 커피를 마시려면 우유나 시럽 같은 도움닫기가 필요하던 커피 입문자에서 비로소 블랙커피의 맛과 향기를 즐길 줄 아는 마니아가 된 듯한 기분도 들게 해 주었다. 마트에서 커피 원두를 사게 되는 날이면 콜롬비아니 아라비카니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늘 뭘 좀 아는 사람처럼 헤이즐넛을 찾았다. 그렇게 산 원두만 족히 대용량 대여섯 팩은 될 것이다.


나의 헤이즐넛 커피에 대한 사랑은 우리 부모님을 전도하기까지 이르렀고 한국에 방문할 때면 나는 언제나 코스트코에서 대용량 헤이즐넛 커피 원두를 사다가 기념품처럼 챙겨가곤 했다.



 

몇 년 전, 남편과 친한 형이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카페를 오픈해서 인사차 찾아간 적이 있다. 작은 공장과 사무실이 모여있는 거리에 생뚱맞게 위치한 카페는 커피 원두를 수입해 매장에서 직접 로스팅하여 판매하는 독특한 곳이었다. 몇 평 안 되는 자그마한 카페였지만 인테리어며 소품이며 하나하나 애정이 담기지 않은 것이 없었고, 주방 쪽에 위치한 꽤 커다란 로스팅 기계는 야망의 스팀을 내뿜으며 원두를 볶을 예정이었다.


"어떤 커피 드실래요?" 사장 형이 커피부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나도 나름 커피 좀 마셔봤다 하는 느낌으로 당차게 "헤이즐넛 커피요"라고 대답했다. 순간, 사장 형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약간의 당혹감, 그리고 파악완료했다는 듯한 (뭘 파악한건지?) 표정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날 우리는 커피의 여왕이라 불린다는 예가체프를 마셨다.

 


그러고 얼마 뒤 인터넷을 하다가 친절했던 사장 형이 왜 그 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헤이즐넛은 땅콩류에 속하는 열매로 커피의 품종이 아니에요. 원두에 인위적으로 다른 향을 첨가해서 만든 향커피입니다."


"향커피는 맛이 없어 상품가치가 떨어진 생두들을 판매하기 위해 개발된 제품입니다. 쌀로 비교하자면 묵은쌀인 거고, 찬밥 처리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죠?"


"인위적인 향을 입히는 과정에서 화학처리를 하기 때문에 이런 데 민감하신 분이라면 다른 커피를 추천드립니다."


"제주도에서 유명 바리스타님이 하시는 카페에 갔더니 헤이즐넛 커피는 취급하지 않으시더라고요."



 

헤이즐넛 커피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나의 표정은 썩어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애초에 아몬드나 땅콩은 잘 알아도 헤이즐넛은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어떤 향이 나는지 맡아본 적도 없었다. 그저 화학처리로 달달하고 구수하게 덧입혀진 향을 헤이즐넛 향이려니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것이다.


자고로 진정 고기 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양념갈비보다 생갈비를 먹는다고 하지 않던가. 커피도 마찬가지다. 커피 좀 마신다 하는 사람들에게 헤이즐넛 커피란 거의 '취급'하지 않는 종류였던 것이었다.


이게 바로 헤이즐넛 열매라고 합디다.


사람 입맛이 간사한지라 그렇게 부드럽고 구수했던 헤이즐넛 커피가 이제는 쓰고 텁텁하게만 느껴진다. 코스트코에서 세일할 때 쟁여둔 아직 뜯지도 않는 헤이즐넛 커피 원두는 그렇다 쳐도, 부모님을 잘못된 길로 인도한 나의 죄는 어찌 씻을까.


다음에 올 때 헤이즐넛 커피 좀 더 사다 달라는 아빠의 부탁에 내 얼굴은 그날 그 사장 형처럼 민망해졌다.


“아빠 있잖아, 내가 사실 할 말이 있어...”


커피원두는 죄가 없습니다..


이전 02화 라떼와 혜선 대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