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주는 사람의 부재
누군가의 권유라거나 어떤 심각한 위태로움을 느낀 건 아니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Tipping point(임계치)'라고 한다. 사람에게도 임계치가 있다면 어느 순간 내 안의 어떤 임계치가 깨져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임계치를 넘기게 된 그 사건 자체가 크게 특별한 건 아니었다. 다만 댐의 수위가 가까스로 90~95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 사건으로 100을 넘기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쉽게 다 잡았을 일에도 멘탈이 쉽게 흔들렸고 무엇보다도 가파르게 내가 가지고 있는 개성들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정신적으로 잠시 멈춤이 필요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어 심리 상담을 신청했다.
처음 받아보는 심리 상담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싶지 않아 별 다른 정보들을 찾아보지 않고 회사에서 제휴 중인 어떤 심리 센터를 예약했다. 10분 정도 꽤나 자세한 개인 문진표를 작성하고, 약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온화한 인상의 심리상담사 분을 만났다.
1시간 남짓의 상담시간 동안 내가 느끼는 다양하고 원인 불명의 불안함과 방황에 대한 해결책을 기대하는 건 당연히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자고 다짐했다.
여행지에서 처음 본 사람과 신기하리만큼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를 밤새 나눠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다음 날 바로 각자 갈 길을 갔기에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 기억이 안 나지만 어떤 친한 친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술술 나와서 놀랐던 기억만큼은 생생하다.
이번 상담에서 내가 그렇게 이야기만 할 수 있어도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 나와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으니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래서 상담사님이 조금은 편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상담시간의 대부분을 나 혼자 이야기했다.
상담사님은 중간중간 나의 중구난방 이야기를 정리해주고, 궁금한 부분들을 묻기만 하셨다. 그중에서도 '왜 현재 상황에서 불안함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어보셨다. 그때 문득 한 3년 전,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쯤 친한 학교 후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 난 정말 꼰대스럽게도 아직 취준도 시작하지 않은 대학생 후배들을 모아놓고 첫 출근했답시고 회사 욕을 신나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근데, 난 형이 나영석 PD 같은 사람이 될 줄 알았어."
후배는 웃으면서 가볍게 말했고, 나도 웃으면서 "내가 어떻게 나영석 PD가 돼."라고 했지만 후배의 말 뒤에 (근데 결국엔 형도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버렸네.)라는 말이 들린 것 같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굉장히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그 후배는 신입생 때부터 내가 하는 일들이 재밌어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뭘 할 때마다 같이 해왔던 후배였다. 스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할 때도, 남들 다 공모전 준비할 때 내가 재미있어 보이는 주제가 없으니 우리끼리 단편영화나 만들자고 할 때도. 그렇게 하고 싶은 것 다 하던 사람이 TV 속 흔한 직장인처럼 되어버렸다는 점이 실망이었을까?
상담사님께 그때의 기억들을 말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거침없이 할 때의 감정이 떠올랐고 그것들을 잃어가는 지금을 내가 너무 억울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 현재를 바꿀 용기도 노력도 없으면서 마냥 불평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막상 실천하면 바뀔 수 있고, 언제든 새롭고 재밌는 것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의 그런 면을 좋아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런 것들에서 멀어지는 것이 불안했다. 그렇지만 이번 심리 상담을 통해 아직은 그때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쌓아온 상담사님의 스킬일 수 있겠지만, 내 두서없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수기로 적으면서도 시선을 놓지 않으시는 모습이 마치 나보다도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시는 것 같았다. 별다른 위로나 근거 없는 응원을 하지 않으신 것도 좋았다. 내 이야기만 실컷 하고 오겠다는 내 목표는 이미 이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