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다본것들 #1
직장인 7년 차, 한국에서의 일하기
10시쯤 출근하여 아침 스크럼(회의)으로 오늘 할 일을 이야기하고, 커피 한잔을 뽑아와 어제 하던 일을 마저하다 보면 금세 점심시간. 팀 사람들과 오늘은 무얼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매일 먹던 그 가게에 또 가고, 다 같이 회사 카페에 가서 둘러앉아 각자 스마트폰 게임하고. 점심시간이 끝나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업무. 한창 업무를 하다가 회사 동기들과 단톡방에서 회사 욕도 하고, 팀 사람들과 단톡방엔 짤방을 던지며 웃기도 하다 보면 어느새 5시. 출출해지면 팀원들과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하고 돌아와 일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시간.
어떤 날은 커피 한잔 못하도록 바쁘고, 어떨 때는 하루 종일 회의하느라 책상에 앉지 못하고. 종종 야근으로 밤늦게 퇴근하고, 회사 사람들과의 술 한잔으로 얼큰하게 취해 택시 타고 돌아오면 하루가 끝나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의 삶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먹고 살만큼 돈도 벌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괜찮았던 좋은 회사에 다녔다. 몇 년 돈을 모아 결혼해서 20평대 아파트 대출해서 사고, 3년 정도 신혼을 보내다가 아이 낳고 워킹맘으로 남들과 같이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머리 속에 나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아니? 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라는 대답이 바로 나왔다. 무난하게 흘러가는 회사에서의 일상은 점점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퇴근 후든 주말이든 개인 작업에 몰두하던 열정적인 나는 최근 2년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새로운 목표가 필요했고,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외국에서 살아보는 일이 다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외국에서 왜 살고 싶어? 외국도 똑같아.
미국은 더 줄을 잘 타야 하고, 뒤통수치는 동료들은 더 많아.
어릴 적부터 외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지인들이 이런 조언을 많이 해줬지만, 그렇다고 외국에 나가서 산다는 오랜 꿈을 접은 적은 없었다. 사실 외국에 못가는 이유를 대본다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셋집도 빼야 하고, 차도 팔아야 하고, 키우는 강아지 2마리는 어디에 맡기며, 부모님들께는 어떻게 말씀드릴 거고, 일 안 하면 뭐 먹고살 건데, 등등 안 되는 이유는 계속 계속 말할 수 있었다. 외국 나가서 잘 살 수 있을까? 인종 차별이나 사기라도 당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어떤 일이든 어려운 점들은 있기 마련이다. 회사 업무도 마찬가지지만, 뭐든 한다고 하면 또 어찌어찌 하나씩 해결해가다 결국 되곤 했다. 해보자라는 마음먹기가 가장 큰 고비인 듯하다.
그렇게 2016년 12월, 4년 가까이 몸 담았던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한 달 후에 발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두 달가량 발리와 태국에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이후 반년 정도 어학연수를 하며 여기저기 지원해볼 생각이다. 사실 상세한 계획은 없다.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인 콘셉트로 정말 아무 준비 없이 무작정 떠났다.
Hubud in Ubud에서 일하기.
보통 이르면 10시 늦으면 12시, 유동적으로 후붓에 출근한다. 종종 근교 여행할 때를 빼면 거의 매일 출근하여 일하는 편이다. 점심에 가까울수록 날씨가 더워지고 차가 막혀서 빨리 출근하는 게 이득이다. (알지만 아침잠이 많아 맨날 늦는다ㅋㅋ) 오토바이를 타고 숙소에서 10분 정도를 달리면 후붓에 도착한다.
최근에 우붓의 올리브영인 가디언 약국이 1층에 생겼다. 가디언 약국 옆 작은 입구로 올라가면 신발을 깔끔하게 벗어놓으라는 문구와 함께 신발장에 슬리퍼들이 가득 있다. 슬리퍼들을 보고 아, 오늘은 사람이 많구나, 적구나를 가늠할 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데스크에 스탭들과 아침 인사를 한다. 항상 보는 스탭들이 데스크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
그 오른편에는 커피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이 곳을 통해 실내 업무 공간, 실외 업무 공간, 2층 업무 공간으로 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곳에서 전화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기도 하고, 처음 온 사람들은 여기에서 컴퓨터 인증을 한다. 화장실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마주쳐 눈인사도 하고 대화도 한다.
실내 공간에는 팀 단위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다들 모여 앉아 작업을 보며 토론을 나눈다. 안쪽은 좀 더 편한 의자가 있어, 늦게 가면 자리가 없다. 에어컨이 없기 때문에 선풍기가 여러대 있다. 프린터도 있고, 안쪽에컨퍼런스 룸이 있다. 컨퍼런스 룸 옆에는 자기가 만든 앱 홍보나 디자이너 구한다는 벽보가 붙어있다.
2층 공간에는 스카이프 룸이 있어 긴 통화를 할 때는 이 곳을 이용하고, 낮잠을 자는 공간도 있고, 일도 할 수 있다. 보통 낮에는 지붕이 뜨겁기 때문에 덥고, 비가 올 때는 더욱 시원하다. 다른 곳보다 더 어두워서 조금 더 집중이 잘된다.
난 항상 실외 공간에서 일했다. 후붓에 에어컨이 없기 때문에 종종 바람이 부는 실외공간을 더 선호한다. 바로 앞에 논을 보고 일하면 시각적으로 힐링되는 기분도 들고, 비가 오면 빗소리에 시원한 느낌이 바로 전해진다. 출근하면 항상 보는 친구들이 있다.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하는데, 인테리어 디자인과 앱 개발을 하는 인도네시아 커플, 유희열의 이마를 닮은 러시아 안드로이드 개발자, 머리에 꽃을 달고 다니는 사랑스러운 호주 마케터, 브라질에서 태어난 전화 영어 선생님 등 다양한 직종의 디지털 노마드들이 매일 출근해서 일을 한다. 실외 공간에는 카페도 있어서 점심 대신 샐러드나 과일 주스를 시켜 먹는다.
종종 후붓에서는 네트워킹을 위한 이벤트를 한다. New Members Day나 Bitcoin Seminar 같은 정기 이벤트도 열리고, 가끔 구글이나 기업들과 연계하는 비정기 행사도 열린다. 또 자신이 어떤 정보를 공유하거나, 자신의 프로젝트를 함께 할 사람들을 구할 때도 후붓에서 대신 홍보해주며 세미나가 열린다. 얼마 전에는 Playbali라는 인디 게임 개발자들의 게임 공유 이벤트도 열렸다. 이벤트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떻게 떠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리모트로 일하는지 등을 이야기하며 흥미로운 정보도 얻고, 서로 용기를 주기도 한다.
나는 이 곳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아르바이트 하나와 해외 취업을 위해 포트폴리오 정리를 하고 있다. 아르바이트는 적은 비율로 하고, 대부분 포트폴리오 정리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편이다. 포트폴리오 정리가 끝나면 웹사이트를 만들 예정이다.
여행 메이트 로니는 본인이 만들고 싶은 앱을 개발 중인데, 나보다 집중력이 월등히 좋아 2주 만에 앱 하나를 뚝딱 만들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간단하게 둘이 오늘 뭐할지에 대해 스크럼 하고, 2주 한 스프린트가 끝나면 일요일에 이번 스프린트 일을 잘 했는지 회고도 한다. 게으르고 늘어지는 것에 대한 최소한에 방지책이다 ㅎㅎ
보통 11시에서 6시까지 일한다. 저녁에 집에 가면 밥을 먹고 수영을 한판 하고, 글을 쓰거나 영어 공부를 하다 잠이 든다.
어떤 점이 다를까?
자연을 보며 일한다는 것. (이것은 강원도나 제주도에 가서 일해도 비슷할 것 같지만ㅋㅋ) 탁한 사무실 공기가 아닌 자연 바람을 쐬며 초록색 풍경을 보며 일한다는 것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 종종 집중력을 위해 noisli.com 사이트에서 자연의 소음을 일부러 들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종종 모니터 위로 바람이 불면 그야말로 상쾌하고, 비가 오면 발 끝에 물방울이 느껴지며 빗소리 가득한 공간에서 일을 할 수 있다. 눈으로 귀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이다.
또,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다.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이 업무와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인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내가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으니 매우 자유롭고 마음이 편하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 같다. 각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이 곳에 와서 자유롭게 일한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한국에서의 치열했던 삶에 위로가 된다. 또 매일 같이 모르는 이들과 소통하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마음대로 살기.
항상 한국 사람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란 이야기를 많이 한다. 하지만 젊음을 희생해서 나중에 성공하면, 그래 그때 힘들길 잘했어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젊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한정적이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했을 때 지금의 삶을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한국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기대되지 않는 미래였다. 내가 회사에서 이렇게 버티면 더 재미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생동감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답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매일을 기대하고, 순간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며 지내고 있다. 이 곳에 나와보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행과 일을 병행하며 즐거운 삶을 산다. 한국을 떠날 때 많은 친구들이 이런 나의 도전을 응원해주고 부러워했다. 언젠가 여행이 오래되면 또 지루해질 수 있을 테지만, 그때마다 난 내가 하고 싶은 선택을 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도 그런 선택을 하고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