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와 성장
1억 글로벌 서비스를 만들며 배운 것들 1 글과 이어집니다.
한국의 대기업에서 오래 일했던 만큼 많은 퍼포먼스 리뷰를 했지만 실제로 그렇게 기억에 남는 피드백은 없었다. 선배들은 웬만하면 나쁜 얘기는 쓰지 마라, 어차피 다 돌아온다는 식으로 조언해줬고, 나도 실제로 솔직한 피드백을 썼다가 후회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해서 좋았어요'라는 식의 별 내용 없는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그랩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적응이 어려웠던 것도 이 피드백 문화이다. 스프린트가 끝나면 회고 때마다 동료들이 서로 일하는 방식에 대해 피드백을 거침없이 준다. 그리고 나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구체적으로 최대한 줘야 한다. 일하기 시작하고 초반에 개발자가 나에게 직설적으로 피드백을 줬을 때, 많이 당황했었다. 상처도 조금 받긴 했는데, 돌이켜보니 함께 일하면서 맞춰나가기 위한 피드백이었다. 불편한 점을 바로 얘기를 해줘야 서로 빠르게 맞추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에서 '겸손이 미덕, 나나 잘하자'라는 마인드를 오래 갖고 있던 나는, 회고 미팅에서 나에 대한 반성을 그렇게 혼자 했다. 사실 회고는 나보다는 서로 함께 일해나가면서 칭찬하고 맞춰나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칭찬을 하려고 더 노력했다. 물론 여기서 피드백을 주는 것과 함께 신뢰를 쌓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신뢰없는 피드백은 조직에 독이 되기도 한다.
또한 업무에 대한 피드백도 굉장히 활발하다. 처음에 어려웠던 것은 워낙 한국 문화에 익숙하다 보니, 팀장님이나 높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넘기기가 어려웠다. 한국에서 일할 땐, 직급이 높은 사람이 얘기한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진행하는 경우를 자주 보았다. 하지만 그랩에서는 높은 사람이 피드백을 준 것에 대해 디자이너가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의도가 뭔지 묻고, 그래도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말이 되지 않는 피드백이라면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시니어가 될수록 자신의 의견을 더 설득력 있고 인사이트 있게 말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어떤 미팅이든지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초반에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참 난처했다. 영어도 능숙하지 않은데, 모든 일에 다 코멘트를 하기도 어렵고, 다른 사람의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을 때 불쑥 피드백을 달라고 하면 당황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적응한 후에는 미팅 내내 어떻게든 피드백을 주려고 머리를 짜냈다. 피드백을 잘 주는 것도 시니어의 역량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리드가 되면서, 어떻게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피드백을 주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도 열심히 고민했었다.
한국에서 승진하려면 사실 팀장님과 친해야 한다고 농담처럼 얘기했었지만, 사실 어떤 조직에서는 현실인 경우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다음 레벨의 디자이너가 되는지에 대해서 누군가 알려준 적이 없었다. 단순히 '잘하면' 되겠지 하는 기대감만 있었다.
Career Ladder는 디자이너의 레벨과 역량이 정리되어 있는 문서이다. 디자인 조직에 공유되어 각 레벨에서 어떤 역량을 갖춰야 하는지 알려준다. 처음 문서를 봤을 때 너무 좋았던 것은,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를 성장시켜야 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시니어에서 리드로 승진할 때도, 1년 전부터 매니저와 함께 그 문서를 보면서 승진을 위해 어떤 프로젝트를 해야 할지, 어떤 발표나 활동을 해야 할지 오랫동안 논의하고 계획했다. 리드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팀이나 디자이너들에게도 임팩트를 줘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프로젝트 제안하여 이끌었고,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고심하여 피드백을 줬고, 회사 전체 디자이너들 앞에서 발표도 했다. 쉽지 않은 일들이었지만, 명확한 목표와 해야 할 일들이 있어 짧은 시간 안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오래 일하다가 싱가포르에 가서 못하는 영어로 일을 하려다 보니 스트레스로 정신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어느 정도 회사에 적응 후에 웬만한 일을 큰 무리 없이 해내면서도, 스스로 계속 의심하고 자책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자존감이 떨어진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나중에 그게 임포스터 신드롬(가면 증후군)이라는 것을 매니저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랩에서의 마지막 매니저는 아마존 출신의 매우 유능한 디자이너였는데, 그 사람도 스스로를 과하게 채찍질하며 커리어를 쌓았다고 한다. 충분히 잘하는데도 스스로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들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줘도) 부족한 점만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특히 한국 문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항상 높은 기준을 세우고 모두가 그 기준으로 달려가길 암묵적으로 압박하기 때문에, 내가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마치 도태되고 문제가 있는 듯이 스스로를 평가한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나약하다’, ‘너만 힘든 게 아니다’ 라며 견디기를 요구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랩에서는 정신 건강에 대해 확실히 중요하게 여기고,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몸이 아플 때처럼 쉬기를 권고한다. 나는 한국의 심리 상담사와 리모트로 계속 상담을 받았는데, 장기간 상담을 받으니 현재는 임포스터 신드롬을 많이 극복하게 된 것 같다. 예전보다 스스로 믿어주고 응원해주며, 내 생각과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다면 견디지 말고 반드시 심리 상담을 할 것을 추천한다.
프로세스의 마지막에서 중요한 것이 성과를 통해 가설이 맞았는지 검증하는 것이다. 그랩에 있는 동안 데이터를 다루긴 했지만, 내가 맡은 영역의 특성상 깊게 다루지는 못했다. 앱의 홈스크린을 주로 담당하다 보니, 주요 지표들이 클릭률과 트랜잭션으로 한정적이었다. 향후에 기회가 된다면 전체 플로우를 개선하여 각 Funnel(주요 과업의 단계)의 지표를 올리는 프로젝트를 제대로 해보고 싶고, 더 다양한 지표를 다뤄보는 프로젝트도 해보고 싶다. 또한 내가 만든 디자인의 성공 지표 Success Metrics도 피엠과 데이터 애널리스트와 함께 토론해서 같이 생각해내는 경험도 깊게 해보고 싶다.
그랩에 있는 동안 리드 디자이너로 승진했지만, 승진 후 얼마 안 있어 팀을 옮기다 보니 사람들을 리딩 할 기회가 부족했다. 첫 팀에서 몇몇 디자이너들을 짧게 리딩 하는 경험을 했지만, 어떻게 동기 부여를 할지, 어떻게 효과적으로 일을 나누어 줄지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것 같다.
또한 그랩 앱 홈스크린 리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니어 매니저들에게 프로젝트와 아이디어를 설득하고 동의를 얻어내는 경험도 돌아보니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다른 리드들에게 조언을 구해보니, 이렇게 많은 팀을 움직여야 하는 큰 디자인 프로젝트에서는 특히 비전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바로 비전으로 갈 수는 없다 하더라도, 비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속도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디자인을 보여주기 전에 비전을 먼저 공유하여 설득해야 한다. 처음으로 맡았던 대형 프로젝트가 아쉽게 끝났지만, 다음에 다시 기회가 온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직하는 회사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다.
짧지만 알찼던 2년 8개월이었다. 그랩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원하던 직장으로 이직도 할 수 있었고, 나의 생각도 역량도 훨씬 넓어질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랩 인터뷰 후기를 쓴 게 얼마 전 같은데 벌써 퇴사를 하고, 영국에서 회고를 쓰며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것을 보니 참 시간이 빠르다.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오랫동안 바라 왔던 것을 고되지만 하나씩 이루면서, 마음먹고 천천히 준비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되돌아보면 가장 중요한 건 사람들이었다.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부족한 나를 친절하게 도와주던 동료들이 있어 잘 적응할 수 있었고, 항상 넌 잘하고 있다며 응원해주던 동료들이 있어서 더 나아갈 수 있었다. 혼자서는 지금의 내가 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이제는 절친한 친구들이 된 그들에게 항상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