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or Things, 2024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임신한 채 다리에서 투신한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는 천재적인 과학자 고드윈 백스터(윌렘 대포)에 의해 되살아난다. 어른의 몸과 아이의 뇌를 가진 벨라는 고드윈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하지만 갈수록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새로운 경험에 이끌린다. 그런 벨라를 사랑하는 의사 맥스(라마 유세프)와 약혼을 하지만 뛰어난 외모의 벨라에게 반한 바람둥이 변호사 던컨(마크 러팔로)를 만나게 되고 세계여행을 시작하며 놀라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코미디/뮤지컬 부문 작품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2023년 영화계에 많은 이슈를 뿌렸던 <가여운 것들>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그리고 주연배우 엠마 스톤의 행보는 아트버스터(아트하우스+블록버스터)에서 믿고 보는 이름임을 다시 한번 관객들에게 각인시켰다. 각종 시상식을 양분한 <오펜하이머>와 크리스토퍼 놀란, 킬리언 머피에 충분히 버금간다.
란티모스 감독의 화려한 수상내역과 함께 동시에 떠오르는 또 하나의 이름은 그의 작품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스탠리 큐브릭이다. 모든 작품이 명작으로 기억되는 큐브릭 감독이었지만 왜인지 유난히 상복이 없었다. 영국의 저명한 영화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10년마다 선정하는 최고의 영화 리스트에서 감독들이 뽑은 역대 최고의 영화 1위에 오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받은 시각효과상이 아카데미에서 받은 유일한 상일 정도다.
큐브릭은 과감한 연출로 빚어낸 독창적이고 환상적인 영상미, 인간에 대한 불신과 냉소적인 시선, 독특한 캐릭터만큼이나 뛰어난 세계관 구축 등으로 란티모스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킬링 디어>는 어긋난 (유사)부자관계와 미스테리한 능력에 의해 운명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점에서 <샤이닝>, <더 페이버릿>은 근대 유럽의 귀족사회에서 사랑과 권력 때문에 벌어지는 흥망성쇠를 다룬다는 점에서 <배리 린든>과 유사한 구조다. <가여운 것들>은 유아적인 주인공이 완전히 상반된 환경을 경험하며 어떤 결론에 다다른다는 점에서 <시계태엽 오렌지>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의 주요한 테마는 세계의 충돌이다. 죽은 사람에게 아기의 뇌를 이식해서 부활하거나(<가여운 것들>), 약물과 충격요법으로 범죄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요법이 시행되는(<시계태엽 오렌지>)는 말도 안 되는 설정이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기묘한 세계가 배경이다. 이 배경 아래 과학과 문명을 통한 억압과 세뇌로 자유를 제한하는 닫힌 세상, 폭력과 성이 난무하는 본능과 야만의 세계가 충돌한다. 이 충돌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관객들에게 던져진다.
란티모스와 큐브릭의 차이는 질문이 던져진 후에 발생한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는 마지막까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세계의 냉혹한 질서에 휘둘린다. 루드비코요법에 의해 금지됐던 그의 범죄본능은 치유(?)됐지만 이제 장관과의 약속이 그를 옭아맬 것이다. 반면 <가여운 것들>의 주인공 벨라는 두 세계를 경험하고 스스로 정답을 찾아나간다. 이는 큐브릭과 란티모스의 분기점인 동시에 란티모스의 세계관이 확장됐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란티모스의 작품을 강하게 각인시킨 건 기막힌 엔딩 덕분이기도 했다. <더 랍스터>에서는 사랑하는 여인을 두고 떠나느냐, 장님이 되느냐하는 선택의 순간 엔딩이 올라갔고 <킬링 디어>에서는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가족 중 한 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아버지를 지독하게 그렸다. 시력상실, 죽음 외에는 탈출구가 없는 비정한 세계의 무지막지한 질서로 개인이 파괴되는 순간에 모든 이목이 쏠렸다.
란티모스의 확장은 또 다른 방향으로도 뻗어간다. 란티모스의 캐릭터들은 마리오네트에 비유되고는 했다. 냉혹한 세계의 질서에 파괴되는 역할 탓이다. 벨라의 성장이 주가 되는 <가여운 것들>에서는 그간 묻어두었던 캐릭터의 감정이 폭발한다. 유아기에서 성인까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며 세계를 배우는 벨라는 물론이고, 딸처럼 벨라를 대하지만 억압과 통제를 가하는 양면적인 고드윈 박사(윌렘 대포). 벨라를 유혹하지만, 되레 그녀의 매력에 빠져 파멸하고 마는 던컨(마크 러팔로)까지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채운다.
벨라의 성장에 따라 세계를 보는 눈도 바뀐다. 성인의 몸이지만 문장이 아닌 단어로 의사를 표현하고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유아기에는 무성영화 시대 공포영화 같은 흑백 화면과 어안렌즈를 통해 중심이 강조되고 주변부는 왜곡되는 좁은 화각이 쓰인다. 성에 눈을 뜨고 고드윈을 떠나 던컨과 세계 일주를 할 때는 화려함을 넘어 강렬한 색감을 자랑하는 컬러들로 세상의 놀라운 희로애락이 강조된다. 던컨을 떠나 자기 결정권을 갖고 책과 사회활동으로 자아를 정립한 후에는 빈부격차와 성차별, 참정권과 노동권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 왜곡 없이 차가운 톤의 화면으로 표현된다.
무엇을 골라도 행복해질 수 없는 선택을 강요하는 냉혹한 마무리 대신 통쾌하고 따뜻한 해피엔딩으로 끝맺음한 건 <가여운 것들>에서 볼 수 있는 란티모스의 제일 큰 변화이자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다양한 상징과 고민거리를 던져주었음에도 결국에는 가여운 것들이 모인 대안 가족의 결성이라는 해답은 피가 마르는 것처럼 냉혈한 작품에서 무기력함을 느껴보길 기존 팬들에게는 너무 뜨겁고 일방적인 결론일 수 있다.
막대한 자본이 들어간 작품에서 과감한 노출을 시도한 엠마 스톤의 열정과 놀라운 성취에는 반박할 구석이 전혀 없다. 그에 못지않게 열연을 펼친 명배우들 덕분에 과잉으로 보일 수 있는 세계는 설득력을 얻었다. 다만 여성해방을 성적자기결정권에 국한되게 표현하고 사창가에 취업해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영화적 설정이 자칫 성매매 산업에 대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가여운 것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란티모스의 신작 <카인드 오브 카인드니스>가 개봉을 코앞에 두고 있다. 이번 작품에 함께한 엠마 스톤, 윌렘 데포가 출연한다는 정보 이외에 알려진 게 없지만 기괴한 우화와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의 기이한 동거라는 고난도의 곡예를 무사히 해낸 란티모스의 작품이라면 어떤 기묘한 세계라도 흠뻑 빠져들 준비가 되어있다. 다음에는 부디 피가 얼어붙을 만큼 차가운 냉탕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