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 땐 엄마에게 기대도 좋아
올해는 남편의 부서이동으로 10년 동안 살던 곳을 떠나오게 되었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이제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동네이지만, 우리는 가족의 생계라는 근원적 문제 앞에 오랫동안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나와 남편은 그렇다 치고, 갑작스럽게 학교와 집을 떠나야 하는 딸의 상실감은 무척이나 컸다. 성격이 예민한 딸에게 매일 다니던 학교가 바뀌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상황은 두려운 일이었다.
이사를 하고 처음으로 학교에 가던 날. 딸은 이제 갓 학교에 들어온 8살 신입생처럼 내 손을 꼭 잡았다. 어떤 장난 섞인 말을 건네도 상기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만 지어댈 뿐이었다. 그런 딸이 안쓰러웠지만, 학교 정문을 지나 낯선 교실문에 다다랐을 때 나는 짧은 응원과 함께 딸을 문턱 너머로 보내야만 했다. 딸은 이제 엄마가 해주는 것보다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일이 많아진 11살의 소녀였다.
첫 등교 이후, 딸은 금세 친구를 사귀고 학교 생활에도 잘 적응해갔다. 전에 다니던 학교보다 좋다는 딸의 말에 부모로서 안도했다. 그런데 몇 주 지나지 않아, 딸이 내 작업방으로 들어오더니 자기도 붓글씨를 써보고 싶다며 붓을 든다. 그리고는 서툰 붓질로 쓱쓱 써 내려갔다.
휘몰아치는 바람
버텨야 사람
힘든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딸은 '살다 보면 버텨야 할 게 많잖아' 하더니 곧 방을 나가버린다. 대체 무엇을 버텨내야 했던 걸까?
딸은 여자아이들의 미묘한 감정싸움을 유독 힘들어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공부보다는 친구관계를 더 고민하는 아이였다. 갑자기 떠나온 동네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을 테고, 작년에 태어난 동생 때문에 엄마 아빠에게 서운함도 느꼈을 테다. 그럼에도 이제는 11살이니까. 혼자 버텨내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수학 공부를 하다 힘들어할 때, 차라리 좋아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이야기했을 때도 딸은 말했다.
"이걸 버텨내지 못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잘할 수가 없어, 엄마."
나는 지금 무엇을 버텨내며 살고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에 취해 힘들고 귀찮은 일은 외면하며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꾹 참고 견디는 게 미련해 보여 쉬운 길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무엇 하나 뛰어나게 잘하는 게 없는 걸 보면 나는 딱 좋아하는 만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살아온 것 같다. 공부든 일이든 적당히 하다가 점점 손을 놓았고, 글 쓰는 일도 아직 고통이 될 정도로 치열하지 않다. 이 정도의 삶에 행복하다 느끼며 적당히 살아왔다.
그런데 딸의 말에 자꾸 의문이 든다. 나의 선택과 행동들이 정말 내가 좋아해서였는지, 아니면 핑계였는지. 혹여 나의 행복이 나태한 인간의 자기만족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오늘은 새벽 5시 무거운 몸을 커피로 깨우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무엇이든 하나라도 버텨내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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