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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몽 Jul 29. 2019

[미술관 산책] 미술관 뒤 작은 집

강화도 더리미 미술관




  

   4월은 나와 남편이 결혼식을 올린 달이다. 무려 12년 전의 4월. 지금 떠올려보면 그 날 날씨가 좋았는지, 사람들은 얼마나 붐볐는지, 진정 그때가 봄이었는지조차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몸에 맞지 않는 드레스와 슈트만 떠오를 뿐이다. 그나마 기록으로 남아있는 결혼기념일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좋은 계절에 부부가 되었구나 하고 회상하곤 하는데, 올해도 별 탈 없이 봄은 왔고 우리는 새로운 한 해를 기념하기 위해 가족여행을 떠났다.

  강화도는 서울에서 가까운 터라 쉽게 찾을 수 있는 여행지이지만, 남편이나 내게는 처음이었다. 역사 관련 방송에서 강화도를 보고 막연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게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리 화려한 지역은 아니지만, 색다른 추억을 만들고 싶어 인터넷을 열심히도 뒤졌다. 그리고 조금 특별한 장소를 발견했다. 미술관 뒤로 숨은 작고 오래된 한옥집. 미술관을 통째로 가질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강화도의 시골마을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논과 밭을 풍경으로 1층엔 카페를, 2층엔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본 건물 뒤편으로는 작고 오래된 한옥집이 하나 있는데, 미술관 관계자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것을 일반인에게 오픈하여 한옥스테이로 쓰고 있다고 했다. 미술관을 내 집처럼 드나드는 기분이란 어떨까. 사실 둘째를 낳고 맘 편히 미술관을 가 본 적도 없으니, 잠시나마 혼자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서둘러 예약을 해버렸다. 실제 본 미술관과 한옥집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한 켠을 내어주듯 소박한 정취를 풍기는 곳이었다.







 방에는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없었다. 작품만을 즐길 수 있게 잉여의 것들은 모두 비워버린 것 같았다. 있는 게 어서 나는 이곳에서 평소 곤두선 신경의 끈을 잠시 풀어둘 수 있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딸은 비어도 너무 텅 비어있는 숙소의 모습에 당혹스러워했다. 이제까지 누렸던 여행의 편의나 호화로움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게으름 피울 침대와 제약 없는 tv를 모두 도둑맞은 딸은 한동안 울상이었다. 그런 딸을 달래려 나는 둘째가 잠든 사이, 딸의 손을 잡고 2층 전시실로 향했다.

  딸과는 9년간 단짝처럼 지냈다. 우리 둘은 꽤 오랫동안 하루 세끼의 밥을 함께 먹고, 잠을 잘 때나 목욕을 할 때나 언제나 함께였다. 내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도 같이 나설 때가 많았고, 조금 더 자라 유치원을 간 이후로도 그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일 중 하나가 딸과 카페에 앉아 책을 보는 일인데, 책을 읽다 책 속 이야기를 함께 나누거나 집에서 못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은 결혼을 하고 내가 얻는 보물 같은 순간 중 하나이다.

  그런데 재작년 둘째가 태어나고 그런 시간은 사라졌다. 아빠가 회사에 가고 없어도 우린 늘 셋이어야 했다. 친구사이도 셋이 모이면 자주 싸운다는데, 우리는 이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느라 일 년을 전쟁처럼 보냈다. 엄마들이 육아를 하다 보면 종종 혼자이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딸은 동생 없이 엄마와 외출하는 날을 간절히 바라곤 했었다. 그러니 여행 중 엄마와 단 둘이 나서는 걸음이 얼마나 좋았을까. 딸은 처음 숙소를 보고 받은 충격은 모두 잊은 듯, 내 손을 꼭 잡고 미술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전시실의 입구에는 흰색 천에 그려진 수묵화가 양쪽 벽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먹그림들과의 조우였다. 아기를 낳고 붓을 자주 잡지 못하고 있던 터라 반갑고도 애달픈 마음이었다. 여기에 어찌하여 수묵화가 있는 것일까. 입구 한쪽을 보니 작은 안내문이 있었다. 이것은 수묵화가 아닌 소창을 위한 전시였다. 수묵화는 모두 무명천에 그려져 있었는데, 강화도는 1960-70년대만 해도 소창으로 유명했다. 이불 안감이나 기저귀 등으로 쓰이며, 한 때 130여 개의 공장에서 생산될 정도로 그 산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가 그렇듯 새로운 직물이 등장하며 공장들은 하나 둘 사라졌고, 지금은 6개의 공장만이 남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생계수단이라기보다 강화도의 살아있는 역사였다. 직물산업으로서의 명성은 쇠퇴했으나, 소창 체험이나 전시 등으로 이 지역의 문화로 태어나는 중이었다.

  사람과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 숙명을 지녔다. 이 작은 지역은 얼마 남지 않은 공장을 돌려 지역을 살리는데 힘을 쓰고, 우리 개개인은 급변하는 시대의 순간을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딸과 나 역시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며 생긴 일상의 변화에 수없이 흔들리고 다시 또 살아간다. 우리는 어떻게든 이 시간을 살아내고 싶으니까. 










 



 

  우리는 단 둘 뿐인 전시관을 돌고 또 돌며, 여느 여행처럼 사진을 찍고 봄날의 수다를 즐겼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 순간을 걷고 또 걸었다. 한옥으로 돌아갔을 때, 아기는 여전히 잠들어있었고 우리는 소리 없이 방으로 들어가 아기 옆에 누웠다.


  10여 년 전, 나는 여자에서 엄마가 되고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에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 변화의 순간에 참 많이도 고단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삶을 살고 있다. 바람에 한껏 나풀거리며, 다시 못 올 순간을 또 살아내는 중이다.











written by 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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