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소를 하려고 옷장이나 서랍을 들춰보면 일 년 넘게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온다. 이제는 버려야 하나 싶어 꺼내 놓고 보면 왠지 다시 쓸 것만 같고, 옛 추억도 있어 결국 다시 한쪽 구석으로 집어넣고 만다.
이번 가을맞이 청소 때도 그랬다. 특히 아이방에 들어갔을 때는 자질구레한 물건들 때문에 속이 답답해질 지경이었다. 딱히 쓰지도 않으면서 매번 수집해오는 스티커와 구슬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만들어온 열쇠고리나 팔찌 따위는 셀 수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버리려고 아이에게 물으면 결사반대다. 당장은 안 쓰지만 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나. 아끼는 물건들이니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였다. 내 것이 아니니 함부로 버릴 수는 없고, 그럴 때마다 난 물건들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쑤셔 넣으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다 얼마 전, 차를 타고 병원에 가다가 김창완의 라디오를 듣게 되었다. 예전부터 즐겨 듣던 ‘짱구는 못 말려’의 사연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꼬마 철학자 같은 아이들의 말과 행동 때문에 좋아하는 코너였다. 이 날은 여러 사연 중, 문구점에 간 한 엄마와 아이의 짧은 이야기가 유독 와 닿았다. 문구점에서 아이가 이런저런 물건을 집어 들자, 아이 엄마는 넌 항상 왜 이렇게 쓸데없는 것만 사냐고 나무랐다. 그랬더니 아이가 답한다.
“엄마, 난 쓸데없는 게 그렇게 좋더라.”
계절이 바뀔 때면 ‘이건 이제 필요 없으니 버리자. 아니면 주변 동생들에게 물려주자.’ 하고 딸을 설득했다. 내 눈에는 재활용품이나 쓰레기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얼른 치워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딸은 몇 년, 몇 달간 쓰지도 않은 것들을 다시 손에 쥐며 거부했다. 다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실용성과 가성비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딸은 가지고 있었던 걸 테다. 그래, 이 무용(無用)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없으니까.
20개월이 된 둘째를 보고 있으면 이 무용(無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둘째는 놀이방에 가면 편백룸이라는 곳으로 들어가 작은 나무 조각들을 삽으로 뜨고, 트럭에 담았다가 다시 바닥 위로 흩뿌린다. 아이는 이 단순하고 별 볼일 없는 일을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한다. 대체 이 생성과 소멸의 무의미한 반복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모래놀이나 그림 그리기, 색칠놀이 따위의 것들은 본래 아이들의 놀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거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므로, 아이들이야말로 이것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주체였다. 그런데 요즘은 어른들이 이 무용의 것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사람들과 함께 모여 컬러링북을 칠하고, 로봇을 만들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나 악기 연주로 시간을 보낸다. 돈벌이나 성공과는 거리가 먼, 일련의 과정 자체가 주는 희열을 만끽하게 된 것이다. 마치 잉여의 삶을 부여받은 것처럼, 아이들이 거리낌 없이 즐기던 이 무용의 행위에 빠져들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모두에게 허락된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손에 쥐어줘도 어찌할 바 모를 이들이 아직 수두룩하다. 지난밤, 남편은 10시에 퇴근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영어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기획부서에는 왜 그리도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은지, 남편은 일인지 취미인지 모를 영어공부를 마흔까지 진행 중이다. 겨우 남는 주말 시간은 갈수록 말이 늦어지는 아들과 사춘기를 앞둔 딸에게 내어주고 있으니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시작해보라고 부추겨봐도 그는 매번 같은 말만 내뱉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그럼에도 그는 텔레비전에서 기타를 치며 음악을 만드는 사람을 보다가 혹은 시골 목공소의 분주한 망치질과 대패질을 보다 곧잘 말한다.
‘나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대체 이 무용의 시간을 갖기 위해,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쓸모 있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것일까.
written by 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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