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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몽 Nov 02. 2019

우리가 사는 오늘은



(c) calligraphy by 글몽




 “엄마 이거 봐. 심장을 꺼내는 것 같지 않아?”



  저녁을 먹고 큰 볼에 거봉을 씻어왔을 때, 말랑말랑한 포도알 속에서 씨를 꺼내며 딸이 말했다. 순간 물컹이는 포도알을 씹던 내 입 속에 심장이 하나 덜컹 내려앉은 것 같았다. 이제 포도를 씹을 때마다 심장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들겠구나. 이 기묘한 느낌을 어쩌면 좋나.


  영화 <옥자>를 봤을 때도 그랬다. 영화를 재미나게 보고 다음날 삼겹살을 먹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도살장 앞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던 옥자를 떠올리며 돼지고기를 먹는 건 역겨운 일이었다. 목 뒤로 부드럽게 넘어가던, 나의 생명 연장의 당위성으로 아무렇지 않았던 식사가 살육으로 변질된 것이다. 포도알 하나에 심장이 뛰고 있고, 돼지가 유일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대상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바꾸어 놓았다. 생각을 뒤집고, 몸을 뒤틀리게 했다.

 

  그렇다고 이 일로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단식을 결행한 것은 아니다. 울렁거림은 시간이 지나자 점점 사라져 갔고, 돼지고기쯤 다시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느낀 생명의 무게는 쉽사리 떠나지 않고 식탁에 남아 떠오르곤 했다.                     



  ‘살아있는 것들은 가볍지 않아.’




  


  생명은 모두 귀하다는 보편적 진리와는 다르게 이 지구에 서식하는 다양한 종들은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존엄성을 상실한다. 인간이 먹고살아야 하니까. 인간을 다치게 할 수 있으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이니까. 그리하여 살아있는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원숭이를 묶어둔 채 생체실험을 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생명과 존엄의 격차는 쉴 새 없이 끼어든다. 미국에서 백인 경찰은 흑인에게 더 쉽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엄청난 돈과 지위를 가진 사람의 한마디라면 수십수백의 목숨이 사라지고, 소리 없이 묻히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세계에 녹아든 강자와 약자의 분화.


  그 분화된 세계 속에서 나는 인간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나의 아이들은 태어나 걷는 데까지 1년이 걸렸다. 둘째는 2년이 다 되도록 우유 달라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누군가 먹여주지 않으면, 감싸주지 않으면 도무지 혼자서는 살아낼 수가 없다. 어떠한 인종이나 계급보다 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에는 6개월 된 아기가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기는 부모가 집을 비운 일주일간 굶주림에 세상을 떠났다. 그 싸늘한 기사를 보며 둘째를 꼭 껴안았다. 한 때 육아가 너무 버거워 '엄마 도망가버린다'며 화풀이하던 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며칠만 손을 놓아도 생명을 잃을 아이에게 나는 그야말로 몹쓸 위협을 해댔었다.






  작은 아이의 입에 포도알을 물리며 쉽게 사라져 간 생명들을 떠올린다. 매일 내 입 속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과 보호받지 못한 아이들, 차별 속에 갇힌 인종과 계급에 지배받는 수많은 약자들. 그 생명이 지나간 자리에 오늘이 남았다. 누군가의 강자로 때론 누군가의 약자로 살아가며 아직은 누구에게도 먹히지 않은 가엾은 오늘만이 남아 있다.





written by 글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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