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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Feb 10. 2019

싱거운 명절



  새해의 설날, 가을의 한가위. 민족의 최대 명절. 이때만 되면 뉴스에서는 앵커들이 한복을 입고 나오고, 온라인 게임에서는 명절 분위기의 이벤트를 내느라 바쁘다. 하지만 우리 집에선 명절 분위기가 컴퓨터 화면 속 만 못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어릴 적엔 우리 가족끼리 차례를 지내긴 했었는데, 어느 날 아빠가 현대사회와 맞지 않는 허례허식이라며 모든 제사와 차례를 중단하기를 선언했다. 엄마는 좋아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제사 의식이 은근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고, 또 21세기에 그나마 남아 있는 민족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제사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 집은 명절에도 친척들이 모이지 않는다. 사이가 좋지 않거나 멀리 사는 이유다. 그래서 우리 가족만 외할머니 댁에 잠깐 가서 (댁도 바로 옆동네다) 몇 시간 있다가 오는 것이 다다. 다른 친구들의 말이나 인터넷에서 들어 보면 사촌동생들 놀아주기, 친척 어른들 잔소리 등 불편한 것이 많은 모양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세뱃돈도 좀 많이 받게…….


  이번 설 연휴 때, 어차피 하는 것도 없어서 설날 당일이 아닌 그 전날에 할머니 댁에 가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 침대에서 꿈지럭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복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 한복 입을래!"

  엄마는 무슨 젊은 애가 한복을 입냐고 했지만, 나는 차례도 안 지내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한복이라도 입고 기분이라도 내자고 끝까지 졸랐다. 아빠가 자주 입던 남색 생활 한복을 옷장 깊숙이서 꺼내 입었다.



  형이 웬 거적데기냐고 놀릴 만큼 낡고 허름한 한복이었지만, 나는 애늙은이라 마음에 들었다. 바지를 못 찾아서 청바지와 같이 입었는데, 비슷한 색깔이라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설 연휴 내내 이 옷을 입고 다녔다. 집을 나서기 전에는 밖에서도 당당할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롱패딩을 여며 한복을 가리게 되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치는 게 트렌드이지만, 나는 그 미덕을 통달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이걸 입고 피자집까지 갔으니 내가 날 생각해도 웃기면서도 대단하다.


  결국 이번 설 동안 한 것이라곤 할머니 댁 잠깐 갔다 오기, 떡국과 동태전 조금 먹기, 세배 밖에 한 것이 없게 되었다. 적어 놓고 보니 그리 적진 않은데, 차례는 그렇다 치고 윷놀이를 못 한 게 끝내 아쉽다. 윷놀이는 가족 모두가 같이 해야 제맛인데, 형은 나이를 먹고는 전자기기만 붙들고 있을 뿐이다.


  뉴스에서 전하길,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사람이 10명 중 6명이라고 한다. 물론 요즈음 제사 의식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고, 그 근거는 정당하다. 하지만 명절 연휴에 인천공항이 미어터진다는 뉴스와 같이 보면, 그래도 명색이 민족 대명절인 설과 한가위가 초승달처럼 초라해 보인다. 스물두 살 젊은이치고 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민족의 전통인 명절이 조금은 더 그 명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중에 애 낳으면, 차례는 안 지내도 데리고 연이나 날리러 가야지.




오,  그러고 보니 이번 설날엔 특별한 일이 있긴 했다. 브런치 작가가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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