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의 설날, 가을의 한가위. 민족의 최대 명절. 이때만 되면 뉴스에서는 앵커들이 한복을 입고 나오고, 온라인 게임에서는 명절 분위기의 이벤트를 내느라 바쁘다. 하지만 우리 집에선 명절 분위기가 컴퓨터 화면 속 만 못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어릴 적엔 우리 가족끼리 차례를 지내긴 했었는데, 어느 날 아빠가 현대사회와 맞지 않는 허례허식이라며 모든 제사와 차례를 중단하기를 선언했다. 엄마는 좋아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제사 의식이 은근히 재미있는 구석이 있고, 또 21세기에 그나마 남아 있는 민족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제사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 집은 명절에도 친척들이 모이지 않는다. 사이가 좋지 않거나 멀리 사는 이유다. 그래서 우리 가족만 외할머니 댁에 잠깐 가서 (댁도 바로 옆동네다) 몇 시간 있다가 오는 것이 다다. 다른 친구들의 말이나 인터넷에서 들어 보면 사촌동생들 놀아주기, 친척 어른들 잔소리 등 불편한 것이 많은 모양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북적북적한 분위기를 한번 느껴보고 싶다. 그리고 세뱃돈도 좀 많이 받게…….
이번 설 연휴 때, 어차피 하는 것도 없어서 설날 당일이 아닌 그 전날에 할머니 댁에 가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에 침대에서 꿈지럭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복을 입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 한복 입을래!"
엄마는 무슨 젊은 애가 한복을 입냐고 했지만, 나는 차례도 안 지내고 아무것도 안 하는데 한복이라도 입고 기분이라도 내자고 끝까지 졸랐다. 아빠가 자주 입던 남색 생활 한복을 옷장 깊숙이서 꺼내 입었다.
형이 웬 거적데기냐고 놀릴 만큼 낡고 허름한 한복이었지만, 나는 애늙은이라 마음에 들었다. 바지를 못 찾아서 청바지와 같이 입었는데, 비슷한 색깔이라 그리 이상하진 않았다.
설 연휴 내내 이 옷을 입고 다녔다. 집을 나서기 전에는 밖에서도 당당할 줄 알았는데, 나도 모르게 롱패딩을 여며 한복을 가리게 되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걸 미덕으로 치는 게 트렌드이지만, 나는 그 미덕을 통달하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이걸 입고 피자집까지 갔으니 내가 날 생각해도 웃기면서도 대단하다.
결국 이번 설 동안 한 것이라곤 할머니 댁 잠깐 갔다 오기, 떡국과 동태전 조금 먹기, 세배 밖에 한 것이 없게 되었다. 적어 놓고 보니 그리 적진 않은데, 차례는 그렇다 치고 윷놀이를 못 한 게 끝내 아쉽다. 윷놀이는 가족 모두가 같이 해야 제맛인데, 형은 나이를 먹고는 전자기기만 붙들고 있을 뿐이다.
뉴스에서 전하길, 설날에 차례를 지내는 사람이 10명 중 6명이라고 한다. 물론 요즈음 제사 의식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고, 그 근거는 정당하다. 하지만 명절 연휴에 인천공항이 미어터진다는 뉴스와 같이 보면, 그래도 명색이 민족 대명절인 설과 한가위가 초승달처럼 초라해 보인다. 스물두 살 젊은이치고 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민족의 전통인 명절이 조금은 더 그 명맥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중에 애 낳으면, 차례는 안 지내도 데리고 연이나 날리러 가야지.
오, 그러고 보니 이번 설날엔 특별한 일이 있긴 했다. 브런치 작가가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