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이에게 어디까지 해 줄 수 있을까.
예전에 읽었던 영어 교과서 지문이 기억났다.
아기 엄마가 아기를 안고 추운 겨울날 얼어 죽었지만
품속에 발견한 아기는 살아있었다는 이야기다.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갓난아기는 살렸다는 이야기. 진부하지만 애 낳아서 길러보니 그냥 넘길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엄마 까투리> 만화는 똑띠가 좋아해서 아침마다 한 편씩 같이 본다.
아기 까투리들이 위험에 처하면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도와달라는 소리를 명민하게 파악해내고
몸을 던져 구해낸다.
정작 보는 아이는 재밌게 잘 보는데
독박 육아에 지쳐 사랑의 마음이 희미해질 때
'은혜받고' 펑펑 운 적이 있다.
만화에 나오는 엄마 까투리는 상당히 지혜로웠다.
엄마 까투리의 지혜와 아이들에게 해주는 주옥같은 명언들.
그리고 아이들이 아무리 사고 쳐도
'실수해도 괜찮아'하면서 화내지 않는 육아 고수의 진한 향기가 났다.
아이들 위해 만화를 틀었다가
오히려 엄마들이 빠져들어 보고 있는 만화다.
그 밖에
화재가 나서 불구덩이가 된 집에 뛰어들어가 아기를 구해낸,
하지만 자신은 화상을 입고 살아가는 엄마 이야기도 기억이 난다.
나 또한 아이를 키우면서
'처음 태어났을 땐 데면데면하고 어색한 사이'였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모성애가 부족한 사람인가 하고 고민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랄까.
키우면서 몸이 힘들고 아이와 부딪히면서
사랑의 마음이 커지는 것을 발견했다.
'나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있고
목숨을 바쳐 구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정말 행복이 아닐까 싶다.
나는 시들더라도 네가 꽃이 된다면
그렇게 거름이 되더라도 기쁘게 그리하겠다는 마음.
아이 낳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다양한 색의 감정이다.
그래서 희생이라는 말이 그리 슬프지 않다.
오히려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