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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 Jun 19. 2022

여보세..요?

무드셀라 증후군

언젠가 아들이 친구에게 얻었다며 들고 온 전화기가 부엌 캐비닛 구석에 있다.

매몰차긴 하지만 말 그대로 처박혀 있다고 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맑고 정직한 빨간색에

80년대식 스타일 디자인이 썩 마음에 들었지만  

집전화 쓸 일도 없거니와 우리 집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던 그 전화기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캐비닛 속에 갇히게 되었다.


 

예쁘지만 쓸모없는 것은  못나고 쓸모없는 것보다 오히려 더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인지

그 전화기는 캐비닛 속에서 라면 하나만큼의 임팩트도 주지 못한 채 눈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며칠 전 캐비닛 정리를 하면서 그 전화기를 꺼내 와 TV 아래(말하자면 우리 집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 전화기가 자꾸 나에게 말을 건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러그에 강아지와 누워 뒹굴다가, 황당한 tv뉴스에 인상 찌푸리다가도 전화기에 시선이 머문다.

그러면 그 옆으로 가서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꾹꾹 눌러보고 “여보세요?” 해보게 된다.

물론 아들이 웃을까 봐(아니 무서워할까 봐) 주위를 한번 살피긴 한다.


오래전 내가 눌렀던  전화번호 하나쯤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손가락을 톡톡 쳐보니

번호 몇 개가 떠오르는 듯도 하다.

정확한 번호를 머리기억한다기보다는

번호판을 눌렀던 내 손가락의 율동이 30여 년이 

지났건만 남아있는 것이다.

그저 성냥불이 켜졌다 꺼지는 찰나의 속도로  떠올랐다 사그라져 버리던  옛 기억들이

전화기를 만지고 있으면 꼬리를 물고 눈에 어른거린다.

깜깜하던 그 기억들에 나는 전등을 켠다.

오래된 필름 카메라 사진처럼,

빛바래고 먼지 앉은 유화처럼 뿌옇지만

그리 무디기에  

곱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 시절로 막상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절대 선택하지 않을 순간이 있고,

다시 만나기엔 오싹하고 불편한 사람들도 분명 있다.

그러나 회상할 때 만은 그 모든 순간에 노스탤지어 필터를 씌우고, 그들의 안녕을 기원한다.



이렇듯  나는 무드셀라 증후군에 빠져있다.

무드셀라 증후군; 과거를 회상할 때 항상 아름답고 좋게만 기억하려고 하는 기억 왜곡현상이라고 한다.

지나간 것에 우리는 왜 이리 너그러워지는 것일까

어차피 불가능하고, 불가항력적인 것이니 선심이나 쓰는 걸까.




tv에서 출연자들이  과거의 자신에게 전화를 거는 설정 장면을 무심히 본 적이 있다.

(미래를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가정하에) 나는 과거의 나에게 전화를 할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해줄까.


말하지 않고 들어주고 싶다.

재잘재잘될 숫기도 없고, 시시콜콜 물어볼 마음 편한 누군가가 없던

어리고 젊었던 나의 독백을 들어주고 싶다.

네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에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고 나이 들면

다 너그러워질 텐데,

나이 들어서는 그런 척이라도 하고 살아야 하는데

어리고 젊은 날은 부끄러워하지 말고

살뜰하게 슬퍼하고, 결론 없이 방황해도 된다고 안심시켜주고 싶다.

소화시키지도 못할 밥을 꾸역꾸역 삼키듯

감정을 억지로 침잠시키지 말라고

긴 얘기를 듣고 난 후 조그맣게 일러주고 싶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어쩐지 모를 이유로 조금 쓸쓸해지게 되었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지치고

돌아보니 어느새  이제는 출발점이 보이지도 않는

길에 서있는 느낌이다.

앞으로도 나는 얼마나 더 '아득해서 아름다운 얘기들'을 남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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