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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 Jun 27. 2024

선물

아름답고 무용한 것

딩동!


‘고객님의 택배가 오늘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침 문자를 받고 설렌다.


‘택배는 사랑’이라 어느 것이든 반갑지만 오늘 물건은 더 기다렸던 것이다.


나를 위한 선물.


선물이란 필요한 것이 아닐 때, 그러나 꼭 갖고 싶은 것일 때 그 이름값을 더하는 것 같다.


오늘의 선물이 꼭 그러하다.




사실 나는 나이 들면서 자연스레 미니멀리즘을 따르고 있다.


무소유의 겸허한 철학을 실천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열렬한 환경주의자도 아니다.

그저 귀차니즘의 발로일 뿐이다.


물건들의 제자리를 정해 반듯하게 정리하는 게 힘들어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품목을 늘이고 싶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배달 올 물건은, 아니 선물은 나 자신을 위해 사기에 참 생뚱맞은 것이다. 가격도 싸지 않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러나 고민 끝에 들여온 것이 벌써 다섯 개째다.




드디어 택배 박스를 열고 겉 상자부터 꼼꼼히 살핀다. 귀하신 몸인데 어디 쿡 찍혀 있기라도 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행히 깨끗한 자태로 내 품에 안겼다.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쏟아내어 펼쳐본다.


2000개가 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조각들이다.


레고 블록!!




웬만한 책 분량의 설명서를 보며 난이도를 예상해 보고, 조립순서대로 소포장을 다시 정리해 두고, 작은 블록 조각 분실 방지를 위해 작업용 트레이도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는 눈으로 즐기기만 한다.  


반가움에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을 때쯤 조립을 시작한다.




블록 조립을 하는 동안은 두 감정이 교차한다.


빨리 완성품을 보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립하는 과정의 행복을 지속하고 싶어 남아있는 블록이 줄어들수록 아깝다.


마치 아이를 키워나갈 때의 마음 같다.


얼마나 근사한 모습으로 완성될지가 퍽 궁금하면서도 손톱보다 작은 블록조각들을 알알이 끼워 맞춰가는 집중의 그 과정만 계속 반복하고 싶기도 하다.




2000여 개의 조각들을 적당히 배분하여 매일의 행복으로 치환한다.


평안한 날에는 그 평안을 생동감 있게 바꾸어 주고, 정신이 산란한 날엔 그 산란을 차분히 가라앉혀준다.


아이들 어릴 때, 바닥에 어질러 놓은 블록을 밟고 아파서 짜증 내며 통박 주고 지겨워했던 그 작은 조각들이 나이 50이 넘어서 이렇게 예쁘고 소중한 즐거움을 주다니 인생은 참 오래 살고 볼일이다.




이번에 고른 작품은 레고 창립자가 쓰던 타자기를 그대로 구현한 레트로 감성 폭발의 레어템이다.


일부러 느릿느릿 음미하며 열흘에 걸쳐 완성했다.



톤다운 된 올리브 그린 색깔도 참 곱지만 실제 타자기처럼 줄 바꿈 손잡이, 둥글개 손잡이뿐 아니라 버튼을 누르면 글자쇠도 움직이는게 마냥 신기하다.


결제 버튼을 누를 때의 속 쓰림은 먼 곳으로 사라지고 선물 참 잘 골랐다 싶어 뿌듯하다.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내 원체 좋아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여유로운 나의 삶이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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