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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마스떼 Nov 20. 2020

버리지 않길 잘했다

'윙~~째깍째깍째깍...'

주방에 들어서면 냉장고 소음과 함께 1+1으로 따라오는 시계 소리다.

이사 오고 나서 주방에서 시계 볼일이 딱히 있을까? 했는데 의외로 시계는 필수였다. 요리는 잘 안 해 먹어도 

계란 삶을 때 시간을 체크해야 했으며 아침에 커피 한잔 준비하다가도 지각 아닌지 수시로 체크하기 위해 시계가 필요했다.


며칠 후 1만원대 가격으로 라면이랑 사진 찍으면 예쁠 것 같은 손바닥만 한 스탠드형 AA 건전지로 움직이는 시계를 샀다. 나름 알람에, 인테리어 기능도 있는 아주 가성비 좋은 시계였다. 어느덧 3년 넘게 쓰면서 사진은커녕 먼지만 쌓여 가던 어느 날, 한창 출근 준비하는데 우연히 본 시계가 4시 언저리를 가리키고 있다. 잉? 곧 출근해야 하는데 4시라니? 건전지 수명이 다 되었나 보다. 


퇴근 후 별생각 없이 새 건전지로 바꿔주고 태엽을 감아 시간을 8시 20분에 맞췄다. 이제 다시 나의 삶도 원래대로 맞춰진 기분이다. 샤워하고 나와서 물 한잔 마시러 주방에 들어서는데... 잉? 시간이 그대로다. 시계가 움직이지 않는다. 나도 멈췄다. 다른 건전지를 껴봐야 하나? 시계가 망가진 건가? 아 근데 주방 시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데... 귀찮다. 우선 내버려 두자. 그렇게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어라? 시계는 11시를 가리키며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흠. 아주 망가진 게 아니라 수시로 망가질 모양이다. 가격 대비 아주 만족한 시계였는데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 보다. 인터넷에서 시계를 검색했다. 요즘은 LED 시계가 유행인지 상단 10개 리스트를 점령했다. 조금 더 스크롤을 해보니 탁상, 원형 종류별 시계가 나온다. 흐음, 내가 쓰던 스탠드형 탁자 시계만 없다. 이러면 발품 팔러 돌아다녀야 하는데... 귀찮지만 내일 매장에 가봐야겠다.


한 달 뒤, 여전히 멈춤과 움직임을 반복하는 시계와 계속 동거 중이다.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익숙해진다. 시계를 사야 하는데 자꾸 까먹고 크게 안중요하니 잊고 살만하다. 일주일 뒤. 시계가 다시 째깍째깍 소리를 낸다. 이건 또 뭐지?


시계가 부활했다. 비싼 시계는 아니지만 가성비, 인테리어 모두 만족한 시계라 버리기도 아깝긴 했는데. 고장 났던 시계가 자연 치유했다. 관련 학계는 모르겠지만 보고해야 할 사안이 아닌가 싶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내 주방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시계가 더위를 먹었었나? 여름 내내 말썽이더니 가을이 지나 쌀쌀해진 겨울이 가까워오니 정신이 돌아왔다. 


이상하지만 몹시 반가운 일이다. 살다 보면 알 수 없는 일은 종종 생긴다. 왜 때문인지 굳이 깊게 알고 싶지도 않다. 30년 넘게 살면 잘못된 일도 방치했을 때 크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낌적으로 알 때가 있다. 쓰레기장 직행 열차를 탈뻔했던 시계는 나의 게으름으로 주방의 유일한 인테리어 템으로 다시 인생 2막을 열었다.

티비쇼에 나오는 인생역전 스토리는 우리 집 주방에서도 펼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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