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마는 이제 명함을 못 내밀겠다. 봄날이 무안하리만큼 비가 자주 내리던 어느 날이었다. 출근 필수템이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우산을 챙겨 출근하던 길이었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약 600m 이고 중간에 초등학교가 있어 종종 학교 가는 아이들과 함께 출근하고는 한다. 살짝 여유로운 출근 시간 덕에 아파트 앞의 셔틀버스를 타는 애기들을 구경하며 횡단보도에 선다.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학교 가는 아이들을 볼 수 있어 정적이던 출근길에 발랄한 에너지가 채워진다. 하지만 아이를 데려다 주기 위해 횡단보도에 서있는 아빠의 모습은 부스스한 헤어와 천근만근의 발걸음이 몹시 피곤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학교 가는 아이의 모습은 분홍색 책가방만큼 설레어 보인다. 슈퍼대디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넌 아빠는 이제 도저히 안 되겠는지 아이에게 뒷일을 맡기며 인사를 건넨다. 인터넷 짤로 보던 아빠에게 아이를 맡기면 안 되는 이유라는 짤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
횡단보도를 지나 구청에서 만든 쪽길같은 산책길을 직진하면 바로 초등학교가 나온다. 봄장마를 머금은 산책길의 나무와 조경수들이 더욱 푸르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산책길에 소녀와 나 둘만 남았다. 빗방울이 조금씩 분홍색 가방에 떨어진다. 곱게 빗은 양갈래 머리에 빗방울이 맺힐 것 같다. 가는 방향이 같으니 조금 속도를 내어 소녀를 따라잡아본다. 아이 걸음인지라 몇 발자국만에 금방 따라잡았다. 쓰고 있던 우산을 소녀 쪽으로 조금 내어 준다. 조금 좋은 어른이 된 것 같다. 조용히 씌어주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나란히 걸음을 맞춰 걸어야 했기에 결국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인을 줘야 했다
"학교가니?"
"네~"
이런.. 너무 당연한걸 물어본 것 같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니 불편할 수 있으니 나의 의도를 전달해야겠다.
"우산 같이 쓰고 갈래?"
"아, 아니요~"
음. 이건 예상 못했지만 낯선 어른을 경계하는 건 좋은 일이다. 아까 잠깐 본 아빠가 잘 가르쳐 준 것 같다. 다만 낯선 아이에게 흔치 않은 호의를 보인 나의 선심에 조금 더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학교 앞까지만 같은 방향인데 같이 쓸래?"
"아, 괜찮아요~"
자기 의사 표현이 확실한 요즘 소녀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물러서는 게 맞다.
"그래 그럼~"
지금 이 순간, 세상 누구보다 쿨하고 싶다. 쿨하게 이별하는 사람처럼 뒤도 보지 않고 앞장서 갔다. 그게 소녀를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낯선 어른은 경계하는 게 맞다. 다 맞는데 뒤가 씁쓸 한 건 어쩔 수 없다. 나 학교 다니던 시절처럼 우산 없어 서러운 일의 추억이 아니라 요즘 아이들은 2번, 5번 더 경계하는 게 맞다. 머리로는 알지만 씁쓸한 산성비 같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