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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ve That Nov 14. 2017

소중함이 나만이 품은 감정일 때

용기로 알 수 있는 나와 친구의 관계

나는 누군가가 다가오지 않는 한 다가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건지, 남들 앞에서 나서는 건 좋아했는데 일대일로 말을 거는 건 많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모두 앞에서 친근하고 적극적인 친구들을 보면, 신기한 동시에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내게는 저런 용기가 없다. 그래서 잇고 싶은 인연을 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나를 살갑게 대하며 각종 약속에 초대하는 친구들에게 고마움이 크다. 그들의 용기가 없었다면 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매일 새벽 감성에 쩔었을 게다. 나는 친구가 힘들 때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힘들 때 친구를 찾는 사람에 가까웠기에, 이기적인 내게 그들의 존재는 큰 힘이었다.


그래서 세월이 지나며 나도 많이 바뀌었다. 무조건 수동태로 반응하던 약속을 먼저 잡기 시작하고, 잇고 싶은 인연에겐 명절이든 기념일이든 각종 연유를 이용해 안부를 묻는다. 그러면서 느낀 건데, 바뀌고 있는 요즘은 친구들의 그런 용기가 어쩌면 시험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뀌려고 노력하는 내게 있어 가장 큰 좌절감을 주는 건 아무래도 시큰둥한 반응이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의 느린 답장, 그리고 '언제 한 번 보자'를 말하며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 대화는 기껏 냈던 용기를 재고하게 한다. 반면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반색을 하며 먼저 비는 날을 읊을 때는, 그 용기가 감동으로 바뀌기도 한다.

나만 그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했을 때 출처 HerCampus

소중함이 나만이 품은 감정일 때. 특히 그런 소중함이 나와 갖가지 사연으로 얽힌 경우라면, 그 실망과 좌절감은 한동안 가슴에 남아 구석구석을 찔렀다. 물론 머리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유학을 다니며 세 개 도시를 옮겨다닌 터라 각지의 추억을 친구와 연관 시키곤 했는데, 그런 추억이 한 도시에 정착한 친구에겐 평범하디 평범한 일상일 수도 있었다. 내게 그 친구는 도시 OO에 있는 몇 안 되는 친구였지만, 그 친구에게 내겐 도시 OO을 거쳐간 수많은 친구일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여전히 씁쓸했던 건 왜일까. 내가 가졌던 아름다운 기억이, 같은 곳에 있던 누군가에게는 스쳐간 하루 정도로 취급 되어 기분이 나빴던 걸까. 본디 소심한 나의 용기는 이런 반응을 볼 때마다 급속히 사그라졌다. 그런 친구들에겐 굳이 다시 연락을 하지 않는다. 관계가 일방적이라면 굳이 끈을 붙잡을 이유가 없으니까. 역시 나다운, 소심한 복수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요즘 나는, 그 정성을 나를 의외로 따뜻하게 맞아주었던 다른 친구들에게 쏟는 중이다. 내 생각과 다르게 나를 베프로 언급한 친구, 내가 몇 년 만에 뜬금없이 연락했을 때 어서 보자고 약속을 잡던 친구, 어색하게 헤어져 잊고 있었는데 몇 달 뒤 다시 연락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안부를 묻던 친구와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나 또한 자발적으로 마음을 쓰게 되었다. 진정한 친구란, 소중함을 공유하면서도 반가움과 익숙함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존재 아닐까. 감정은 쌍방이어야 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감정은 결코 나를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엔 이런 생각을 한다. 이전부터 따뜻하게 다가오던 친구들은, 사실 감정의 이치를 일찍 깨달은 것뿐이 아닌가. 어쩌면 그것이 용기인 동시에 인맥을 정리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고.


수십 명과 친분을 유지해도 종점에 남는 건 서너 명 뿐이다. 그 서너 명을 미리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먼저 나서 용기 내는 것이 가치있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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