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할 수 있어! 못 해도 해보는 거야!
2010년 처음 호주로 건너간 이래, 가장 큰 추억을 꼽으라면 바로 첫 해부터 밴드 보컬을 맡아 수많은 관객 앞에서 공연한 일일 것이다. 감히 인생 가장 찬란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빈말로라도 훌륭하다 할 수 없는 나의 목소리로 무대를 지배했으니.
되짚어 보건대, 내가 한국에 남았더라면 이런 추억은 없었을 공산이 크다. 보컬 오디션도 몇 번 봤었고 그 때마다 난 떨어졌다. 더욱 감미롭거나, 더욱 발랄한 친구들이 넘쳐나는 반도에서 나의 비중은 그렇게 높지 않았다. 내가 호주에서 보컬로 등극한 계기.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한국과 호주의 교육환경은 많이 다르다. 야자의 유무가 그렇고, 교육방향 또한 그렇다. 내가 한국에 있을 적만 해도 체벌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어졌다고 하니 그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자.
여기서는 고등학교조차 매일 오후 3시에 파한다. 나는 남는 시간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는데, 돌이켜 보면 이 시간에 좋은 기억을 참 많이 쌓은 것 같다. 쇼핑센터 가서 주전부리를 먹든, 시티로 나가서 노래방을 가든. 12학년 때를 제외하면 매일이 카르페 디엠이었고, 일상이 큰 스트레스 없이 즐거웠다.
이 곳에서는 무엇을 하든 "괜찮다", "넌 할 수 있다"라는 대답이 많았다. 내가 한국과 비교해 꼽는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한국에선 스스로 위축되어 돌파구를 찾는 형국이었는데, 여기서는 매일 겪는 즐거움에 또 다른 즐거움을 얹는다는 말이 더 맞았다. 새로운 게 두렵지 않았고, 모두가 그걸 장려했다.
음악시간이었다. 모처럼 자유시간이 주어진 우리는 각자의 악기를 찾아 연습실을 유랑했다. 내가 칠 수 있는 악기는 드럼 뿐이었지만, 거의 고정으로 드럼을 맡아 치는 친구가 있어 그 자리를 뺏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 때의 나는 호주 온지 석달 된 9학년이었다. 발언권을 높이기엔 당돌한 시기였다.
어쩔 수 없이 넘치는 마이크 중 하나를 집었다. 아직 익숙지 않은 친구들 사이에서 한바탕 쇼맨십을 펼칠 수도 없고. 솔직히 그 때는 많이 초라했다. 이제 호주 온 동양인이 마이크만 들고 혈혈단신 친구를 찾아다녔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중학생 때부터 열렬한 락팬이었고, 그런 지라 어렵지 않게 귀에 익은 멜로디를 들을 수 있었다.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Sweet Child O' Mine'이었다.
리프를 치던 친구들은 이전까지 나와 두세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드럼도 그렇고, 베이스도 그랬다. 대충 치는 모습이 '맘 먹은 합주'보다 '막연한 연습'에 가까워 보였고, 그래서 나도 부담없이 끼어들어 휘파람 불 듯 'Sweet Child O' Mine'을 옹알이 할 수 있었다. 모두가 부족했지만 모두가 즐거웠다.
친구들은 내가 이 노래를 아는 게 제법 신기한 지 의외의 웃음을 지었고, 그렇게 우리는 몇 번씩 파트를 읊으며 합을 맞췄다. 당시 낯가림도 심하고 자신감도 없던 나는 끝까지 옹아리로 반주를 따라가기에 바빴다. 그들도 내 모습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지 자기들 이야기만 나누기 바빴고.
그 때였다. 음악 선생님이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우리가 합주하는 모습을 보셨다.
"와, 기타랑 베이스랑 드럼 다 있네? 러브댓 네가 노래하는 거니? 그럼 이대로 밴드 짜서 공연 나가면 되겠다!"
이게 밴드 결성의 계기였다. 급진전에 당황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는 지 친구들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 하는 눈치였다.
"진짜요? 공연 나가라고요?"
"11월에 고등학교 주니어 페스티벌 있는데 거기 나가면 되겠다. 그거 목표로 이 곡 연습해 봐. 아주 멋질 것 같은데?"
그 때 친구들 눈빛이 읽혔다. 환영과 걱정이 반반씩 교차하는 그 눈빛들. 환영은 갑작스레 생긴 공연을 향한 기대감이었고, 걱정은 아무래도 옹알이만 하던 나를 향한 걱정이었을 게다. 모두 부족했지만 개중 압도적으로 부족한 건 나였다.
한국에선 아무리 용을 써도 밴드를 할 수 없었다. 직접 밴드를 만들 여력도 없고, 학교 밴드부라곤 하나 밖에 없어 오디션으로 일일이 멤버를 뽑아가고. 그 때 나는 괜히 욕심 부려서 체리필터 노래했다가 장렬하게 전사했었다. 밴드는 남의 얘기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기회를 거머쥐게 된 나의 심정은 역시나 환희와 걱정이었다. 오, 내가 보컬을 할 수 있을까... 폐가 되면 안 되는데...
그 때부터 나는 껍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낯가림을 탈피하고 일어나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건즈 앤 로지스 노래 부를 수 있었다. 혼자 있을 땐 골백번도 더 불러봤다.
단지 그 때는, 누구 앞에서 보란듯이 뽐내기 민망할 뿐이었다.
친구들은 계속 합을 맞춰 보았고 나는 지속적으로 옹알이만 했다. 가사 보겠답시고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론 내 앞에선 "괜찮다"며 격려한 친구들이지만, 속으론 울화통이 터졌을 지 모를 일이다. 나는 가만히 명상했다. 한 부분이 끝나고, 친구들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다시 기타를 잡으려는 한 친구를 말리기까지 했다.
'기회를 만들지도 못 하는 놈이 오는 기회도 날려 버리면 진짜 답이 없다'
나는 여기가 내 집이라는 생각으로, 나 혼자라는 생각으로 쩌렁쩌렁하게 원음을 올렸다. 고음에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 울림통 덕에 모두가 날 쳐다 봤으니까. 잠시간 눈을 뜨니, 기타를 잡은 친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똑같이 동그랗게 벌어진 입모양 또한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민망함은 더 이상 민망함이 아니었다. 바로 가자, 내가 친구에게 손짓했고, 친구는 곧장 'Sweet Child O' Mine'의 소름 돋는 전주를 재현했다. 그리고 나는 완벽하게 이미지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그 날 이래, 매일 점심시간을 합주로 소비하면서 쌓은 추억은 그 어떤 기억도 비할 바가 못 된다. 공연 당일 나는 제법 괜찮은 보컬을 보여줬고, 그 날 페스티벌에서 가장 많은 환호를 받았다. 다음 날 선생님과 백인 친구들이 "액슬 로즈(건즈 앤 로지스 보컬)인 줄 알았다"고 내게 엄지를 치켜세운 건 덤이었다.
물론 그런 칭찬을 내가 곧이 곧대로 믿는 건 아니다. 언제나 사람을 띄워주고, 별 것 아닌 일에도 "봐봐, 넌 할 수 있다니까"며 설레발을 쳐주는 게 호주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고래를 춤추게 하는 건 칭찬과 격려 아니겠는가. 나는 음악 선생님이 밥상을 차려준 덕에 보컬로 거듭날 수 있었고, 아이들과 선생님의 입발린 칭찬 덕에 어깨를 잔뜩 펴고 살아갈 수 있었다.
아직도 한국 친구들은 내가 보컬로 나선 걸 믿지 못 한다. 보컬은 완벽해야 하는데, 내게는 부족한 점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호주에선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한참 부족한 나도, 격려를 받고 일어서 건즈 앤 로지스 노래를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누구든 할 수 있다. 네가 못 하는 게 아니다.
유학을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아직까지 모를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