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간 실격과 유예 사이

절망하지만, 절망하지 않은 채로

by 무아제로

인간 실격의 요조를 만나면 만날수록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다자이의 문장을 따라갈수록 땅 밑으로 함께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가 느낀 고독이 너무 적확해서, 그 절망이 내 안에서도 천천히 살아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어둠이 두렵지는 않다. 마치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처럼, 요조의 절망은 나에게 어떤 묵묵한 위로처럼 다가온다.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누가 내 속을 미리 들여다보고 쓴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지만 어딘가 동떨어진 사람, 웃고 있지만 속은 서늘한 사람. 그게 요조였고, 동시에 나였다.


요조는 세상을 이해하려 했지만 결국 믿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해 웃고 떠들었지만, 그건 자기 자신을 조금씩 지워가는 일이었다. 타인의 기대에 휘둘리다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실격당한 사람. 그게 그의 비극이었다.


나는 요조만큼 무너지진 않았다. 다만 조금 더 오래 버티고 있을 뿐이다. 나도 사람들과 섞이려 애쓰지만, 불현듯 ‘나는 여기에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임에 가면 어색하고, 전화 한 통에도 괜히 긴장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좋은데, 그 안에 오래 있으면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자주 물러선다. 조용한 곳에 가서 책을 읽거나, 그냥 멍하니 앉아 있는다. 그게 내가 다시 숨을 고르는 방식이다.


요조와 나의 공통점은 세상을 너무 예민하게 느낀다는 것이다.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일에도 나는 마음이 오래 머문다. 요조는 그 감각을 견디지 못해 무너졌고, 나는 그걸 견디기 위해 글을 쓴다. 요조가 세상을 공포로 읽었다면, 나는 피로로 읽는다.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고, 나는 그 안에서 여전히 너무 많은 걸 느낀다. 하지만 그 피로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요조는 인간을 믿지 못했지만, 나는 아직 믿고 싶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 때문이다. 아이들이 건네는 젤리 하나, 누군가의 조용한 안부 한마디, 그런 순간들이 나를 이 세계에 붙잡아둔다. 요조처럼 완전히 실격된 인간은 아닐지 몰라도, 유예된 인간 정도는 될 것 같다.


요조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반복적으로 표현했다. '나'라면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나는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 사랑은 사라져도 이해는 남는다.'


요조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면, 나는 그 어둠의 가장자리에서 글을 쓴다. 완전히 절망하지도, 완전히 희망하지도 않은 채로. 다만 이해하려 애쓰며,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려 애쓰며. 그것이 내가 이 세계를 견디는 방식이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다. 세상은 여전히 낯설고,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서툴지만, 그 서툼이 나를 인간으로 남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괜찮다. 절망하지만, 절망하지 않은 채로.


6a2b0b0b-7ead-4b79-ba54-d608c72d6197.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가장자리의 중력